기자명 김기진 부편집장 (skkujin@skkuw.com)

손석희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인 ‘풀종다리의 노래’에는 그의 앵커 시절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88년 당시 MBC 노동조합은 첫 파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쟁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공정방송 쟁취’라고 씌어있는 작은 리본을 달 것을 요청했다. 당시 ‘뉴스데스크’를 진행하고 있던 손 교수도 노조의 조합원이었지만, MBC의 대표 프로그램에 리본을 달고 출연한다면 회사와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리본을 달기로 한 첫날, 그는 화면에 잡히지 않는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에 리본을 달았다. 리본을 단 것도 아니고 안 단 것도 아니었던 그 행위를 통해 손 교수는 자신을 합리화한 것이었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의 비양심적인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다음 날 회사 측의 만류를 무릅쓰고 리본을 달고 방송을 진행했다.
25년이 지난 9일, 그랬던 손 교수가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 JTBC 보도총괄 사장직으로 취임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꼽히는 손 교수의 종편행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인 뉴스였다. 인터넷상에서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일부 누리꾼은 손 교수를 ‘배신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날 벌어진 논란은 진중권 교수의 트윗 중 일부로 요약할 수 있다. ‘손석희가 바꾸느냐, 손석희가 바뀌느냐’의 문제다.
‘손석희가’ JTBC를 바꾸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시청률 중심의 보도 행태와 정치적 편향성이다. 지난달 24일 JTBC의 간판 보도프로그램 ‘NEWS 9’은 ‘고위공직자 별장 성접대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재연 장면을 내보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았다. 이러한 선정적인 보도 행태 대신 뉴스의 질만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손 사장’의 임무일 것이다. JTBC 뉴스가 1% 내외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현 상황은 오히려 손 사장에게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보수색이 짙은 JTBC에서 손석희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손 교수는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지만, 특유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 때문에 진보적 인사로 분류돼왔다. 오마이뉴스는 손 교수 지인의 말을 인용해 “손 교수가 자신의 저널리즘을 실천해보고 싶던 터에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JTBC의 제안을 받아 종편행을 결심했다”고 보도했다. JTBC는 지난 3월 방영된 ‘썰전’을 통해 지난 대선 기간 종편의 보도가 편파적이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바 있다. 물론 JTBC가 이런 식으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최근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진행자를 영입하는 등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지만, 방송사를 꿰뚫고 있는 가치관의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닐 테다.
믿을 만한 구석은 25년 전 오판을 바로 잡아줬던 그의 양심이다. 니체는 양심을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자부심을 지키고, 또한 스스로의 자아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손 교수는 25년 전 자신의 행동을 두고, 니체가 정의한 ‘양심’을 조금이나마 흉내라도 낸 것 같다고 적었다. 다행히도 이제까지 대중의 입장에서 지켜봐 온 손 교수의 모습도 25년 전 리본을 달고 방송에 임하던 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소망은 영웅을 놓치고 싶지 않은 필자의 꿈이 낳은 막연한 기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손 사장의 JTBC는 시작됐고 그 도전이 성공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 김기진 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