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오늘도 당신은 전쟁터에서 돌아왔다. 대충 씻고 나서 기계적으로 게임기를 켠다. 동료 플레이어 때문에 속을 썩일 때, 게임 회사에 문의했을 때 뻔뻔한 대답이 온 것을 확인했을 때, 게임 하다 막히는 부분이 나면 짜증이 난다. 그래도 게임은 즐겁다. 왜냐하면 게임은 현실보다 훨씬 덜 끔찍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즐겁다
게임 플랫폼 '스팀'에는 등록한 게임을 몇 시간 했는지 알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이것이 300시간을 넘어갈 즘이면 문득 회의감이 든다. 소위 ‘현자 타임’이 온 것이다. 다음부터는 쓸데없이 게임을 할 시간에 자기계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다음날 또 게임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게임 '포탈'의 한 장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록 퍼즐이 점점 어려워진다./ⓒvalve
왜 우리는 자꾸만 게임을 할까? 재밌기 때문이다. 게임은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 게임은 목표가 확실하다. 구성은 게이머가 공들여 해낼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어려워지도록 조절돼있다. 밸브 사의 게임 '포탈'을 예로 들어보자. 이 게임은 실험실을 모두 통과해 보상으로 케이크를 받는 것이 목표다. 실험실의 난이도는 ‘적당히’ 머리를 쓸 만큼 단계적으로 오른다. 어쩌다 실수로 조작을 잘못해서 캐릭터가 죽을 수도 있다. 그땐 죽기 바로 전에 되살아나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런 실패는 게이머의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때면 도전과제, 레벨 업 등 눈에 보이는 보상이 즉각 돌아온다.
반면, 현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인생은 점진적으로 어렵게 ‘배려’해서 설계된 것이 아니다. 책을 매일 읽을 때마다 지적 능력이 오르는지 눈으로 볼 수 없다. 게다가 한 번 죽으면 돌이킬 수 없다.
미래학자이자 게임 디자이너인 제인 맥고니걸은 '누구나 게임을 한다'에서 게임의 이러한 장점을 이용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끌고 오는 개념이 바로 ‘대체현실게임’이다.

게임이되 ‘게임과 다른’
대체현실게임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기획자는 목표를 세워두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웹사이트 △이메일 △GPS 등 다양한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도록 구조를 짜둔다. 혼자나 소수만으로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도록 해서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밖에 없다. 또,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게이머는 자신을 대리할 캐릭터가 필요하지 않다. 실시간으로 게이머들은 단서를 모아 공유하거나, 목표 달성 방안에 대해 서로 토론해가며 문제를 풀어나간다. 무엇보다 대체현실게임은 단순히 게임 속 세상에 머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기를 유도한다. 이런 특징을 가리켜 제인 맥고니걸은 대체현실게임이 ‘반(反)도피주의’ 게임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시도된 대체현실게임으로는 2007년도에 제작된 '노르망디의 이방인'이 있다. 이 대체현실게임은 프리챌에서 제작한 게임 '2WAR'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다큐멘터리 작가 김진환 씨를 도와 잃어버린 오디오 드라마 파일을 찾는 것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암호를 풀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탑골공원 등 현장을 찾아가야만 단서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가상 인물 김진환 씨에게 실제로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기획자가 만든 김진환 씨의 블로그와 카페를 소통의 창구로 삼아 단서를 조합해갔다.
상기한 예시처럼 대체현실게임은 홍보의 용도로 종종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아직 다양한 시행착오와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현실 개선을 목적으로 맥고니걸이 설계에 참여한 대체현실게임들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여기서 그 중 세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대체현실게임
2007년 4월 2일부터 6월 1일까지 운영된 'World Without Oil'의 배경은 석유가 동난 미래다. 1,8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은 오일 피크 이후의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세계는 어떤지 이야기를 덧대 △개인 블로그 △커뮤니티 △트위터 등지에 글을 올렸다.
'Breakthroughs to Cures'은 201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게임이다. 여기서는 오염 탓으로 생겨난 치명적인 질병이 창궐할 2020년 10월 7일을 가정했다. 24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제시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의료 관련 정보 모으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미래를 예측 △질병에 대처할 발상을 제안해야 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발상에 댓글을 달거나 추천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2010년에 나온 'Evoke'의 첫 시즌은 10주에 걸쳐 진행됐다. △식량 위기 △물 부족 △빈곤 문제 등 10가지 중대한 문제에 대해 참가자는 나름대로 세계를 구할 방법과 자료를 제안해야 했다. 또한, 매주 ‘영웅’으로서의 자기 이야기를 완성해가면서 가상의 능력치를 쌓아갈 수 있었다.

낙관적 전망
서울예술대학교 디지털아트학부의 김재하 교수는 ‘미디어 융합에 따른 대체현실게임의 분석 및 구축에 관한 연구’에서 “대체현실장르는 현재까지의 어떠한 장르보다 강력한 파급 효과를 가지는 장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예견처럼 스마트폰의 등장과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는 인터넷은 대체현실게임이 발달하는 좋은 토양이 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모이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일까? 생활, 나아가서 세상을 개선하겠다고 나선 대체현실게임의 한 움직임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