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석(화공09)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고등수학 상'을 보면 명제라는 단원이 있다. 많은 내용이 있지만 필자는 '어떤 명제가 참이면 그 명제의 대우도 참이다. 만약 원명제가 거짓이라면 대우 역시 거짓이 된다'라는 내용에 주목하고 싶다. 만약에, '사람은 생각한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하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대우명제 역시 참이 되는 것이다.
'미래를 기억한다'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한눈에 봐도 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저 문장의 대우는 '과거를 잊는다'가 된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원명제가 상식선에서 거짓이므로 ‘과거를 잊는다’는 말도 거짓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과거를 잊었다” 내지는 “옛날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필자도 그렇다. "아직도 걔 생각하니?"라는 물음에 "아냐, 이제 잊어버렸어"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 사람과 같이 있었던 공간, 예를 들면 학교 근처의 카페, 밤늦은 안암동 거리 혹은 지하철 1호선 혹은 4호선 환승역 개찰구 등의 장소에 가게 되면 여지없이 그 사람이 다시 생각난다. 공간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필자에게 말해주던 것들, 그가 좋아하는 책, 그녀가 필자에게 알려줬던 외국가수의 노래를 접하면 그 혹은 그녀가 기억날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거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과거를 '잊었다'고 늘 말하곤 하지만 사실 '잊은'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하면 마음이 아플까 봐, 고통스러울까 봐 일부러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 있다. 뇌 속에서 과거의 그 기억을 찾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자신이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해 봤지만 그 역시 자신의 뇌의 10퍼센트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필자는 그 10퍼센트를 제외한 공간이 과거의 기억을 위한 공간일 것이라고 가끔 생각해보기도 한다. 도서관에 가면, 신간은 신간 코너에 따로 몰려져 있다. 그리고 나온 지 10년 된 책들이 주 코너에 꽂혀 있다. 출판된 지 30년, 혹은 50년이 된 책들은 이제는 찾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도서관의 창고에 쌓아둔다. 그러다가 그 책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야 직원이 창고 열쇠를 가지고 그 책을 찾으러 간다. 우리의 기억 속에도 틀림없이,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테다. 다만, 최근의 기억들은 꺼내기 쉬운 곳에 있어서 금방 생각나는 것뿐이다. 전 여자친구, 죽은 친구의 기억 같은 가슴 아픈 것들은 '금서목록'에 있어서 그것을 꺼내면 아프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의 기억들은 이제는 너무 낡아버려 뇌 속의 창고 속에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만들어진 개체다. 우리는 과거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지금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리고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도 몇 분 후, 몇 시간 후엔 과거로 바뀌어버린다. 10년쯤 지나면 필자가 이 글을 쓴 기억, 당신이 이 글을 읽은 것 역시 이제 먼 기억이 돼 창고로 들어갈 것이다. 글을 끝내기 전에 이 말만 해야 되겠다. 열심히 살자. 필자는 내 뇌 속의 도서관에 금서목록보다는 다시 꺼내 읽어도 즐거운 도서, 필자에게 도움이 되는 도서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사실 수학적으로 보면 이 명제와 대우는 틀렸다. '미래를 기억한다'보다는 '미래는 기억할 수 있다'라고 원 명제를 잡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하지만 명제를 저렇게 바꾸어도 대우는 '과거를 잊는다'가 아닌 '기억할 수 없는 것은 미래가 아니다'가 돼야 한다. 혹시나 글을 읽고 수학적으로 틀린 것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분들은 문학에서 '시적 허용' 정도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오동석(화공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