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만화가 김태권 인터뷰

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책 안 읽는 이 시대에, 한 만화를 만들기 위해 600여 권이 넘는 서적을 참조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여기 동서양의 고전 원문을 종횡무진하며 독해하고, 몸소 라틴어와 희랍어를 공부하는 만화가가 있다. 바로, 국내에 몇 없는 ‘인문학 전문’ 만화가 김태권 씨다.

유수빈 기자(이하 유) 사전조사를 굉장히 많이 하시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텍스트마다 논조나 어조가 다른데, 어떻게 텍스트를 고르나요?
김태권 만화가(이하 김)
이건 인문학 하시는 분이 ‘훈련’이란 표현을 쓰던데, 보다 보면 어떤 텍스트가 공들였는지 알 수 있잖아요. 또, 다른 학자들이 서로의 텍스트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는지 살펴봅니다. 가령 어떤 텍스트는 다른 곳에서 은근히 까일 때가 있죠.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작업하면서 재밌었던 게, 요하임 페스트의 우익적이면서도 잘 쓴 히틀러 평전이 있어요. 훗날 이언 커쇼가 다른 평전을 내놓을 때 그 텍스트에 대해 ‘괜찮다’고 언급하고는 이야기를 안 해요. 그리고 뒤에 미주를 보면 엄청 까놨어요. 다른 책에서 계속 추천하는 텍스트라면 아무리 제 논조와 달라도 읽어봐야죠. 아예 언급이 없는 텍스트는 저도 무시하고요. 말하자면 텍스트들 간 교통정리가 돼 있는 셈인데, 그걸 보면서 저도 정리합니다. 텍스트 각각의 입장이 다를 때는 관련된 자료를 전부 봐요. 이쪽, 저쪽을 확인하다 보면 대충 감이 오는 것도 있죠. 여기는 아무개 선생님이 장난을 쳐놨구나. 이 부분은 알면서도 슬쩍 넘어갔구나, 이런 식으로요.

유 '십자군 이야기'가 굉장히 성공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0년 동안 25만 부 정도 나왔네요. 빌려서 읽더라도 읽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저는 처음에 낼 때는 인문학 코너에 놓고 팔 생각으로 2천 부를 찍자고 출판사와 말했어요. 왜냐하면, 그 때는 인문 분야가 많이 팔리면 2천 부였으니까요. 근데 이제는 시장이 그거보다 더 줄었어요. 인문학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오지만, 책 쪽은 아니에요.

유 그렇다면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표현에 부정적 견해인 건가요?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틀에 따라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와요. 뭔가 인문학이 결정적인 상황에 다다랐는데, 이후 인문학이 이전의 인문학과 정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텍스트에 대한 경외심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인문학은 제가 상상을 한 적이 없거든요. *데리다 아저씨가 텍스트, 그게 별거냐는 이야기를 한 지가 한참이 됐어요. 이제는 그 이야기를 데리다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하는 시대가 온 거죠.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예전에는 텍스트에 대한 존중이라는 게 있었어요. 텍스트가 단순히 정보 전달의 틀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진 문체를 보고, 제대로 해석해보려고 노력했죠.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글을 정전으로 만드는 일이 20세기의 큰 작업이었잖아요. 그런데 점점 텍스트를 대하는 존중심이나 호기심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전 약간 식겁하는 게, 제가 텍스트를 다루는 법을 훈련받으면서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텍스트에 대한 존중이 없는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인터넷 용어로 말하자면 텍스트가 고자가 되는 시대인데, 그 인터넷조차 권위 있고 고정된 텍스트가 없죠. 그러니까 텍스트의 권위가 사라진다기보다는 모든 텍스트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야 할까요? 근데 어떻게 보면 그게 맞는 것일 수도 있고.

▲ '지식 만화가' 김태권 씨/김신애 기자 zooly24@

유 작품에 언어유희가 종종 쓰이는데, 특별히 이런 개그를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핑계는 생소한 이름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죠. 독일어가 어렵잖아요. 슐라이허 같은 경우는 슐라이허, 허, 허. 히, 히, 히, 힌덴부르크처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인 취향이지 않겠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고우영 선생님 개그에서 세 가지를 많이 따와요. 하나는 *오너캐가 슬쩍 얼굴이라도 들이밀고 장난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아나크로니카, 시대착오적 개그가 있죠. 조조 부하가 나와서 총을 쏜다거나 무전기를 쓰는 장면 같은 것들이요. 세 번째가 바로 언어유희적인 것이고요.
그런데 따오기가 어려운 개그가 좀 야한 부분이에요. 나중에 야한 만화를 따로 그려야겠죠. 하나 생각하고 있는 게 있긴 해요. 그리스 희극에서 반전, 평화, 에로를 내세우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Lysistrate)>라는 작품이 있거든요. 스파르타와 아테나가 맨날 전쟁하니까, 두 나라의 여인들이 전쟁하는 남자와는 자지 말자고 섹스 스트라이크를 벌여요. 그래서 남자들이 욕구 불만에 시달려서 미쳐가는 거죠. 실제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할 때, 세계에서 고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극을 읽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고요. 그거를 20세기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하는 거죠. 그러면 고우영 선생님의 유머 코드를 하나 더 사용할 수 있겠네요.


유 지식 만화를 그린다고 자신을 표현하셨는데, 창작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나요?
물론 있죠. 근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밀려있네요. 일단 '십자군 이야기' 완결부터 내야죠. 5권 작업은 지금 끝나 있어요. 다만 5권 서론의 경우, 제가 하면서 이렇게 자신 없기는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군 같은 종교 전쟁이 일신교가 타락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견해가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에서 타자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걸 구약과 신약으로 풀어내서 배경으로 재구성하기가 어렵네요. 제가 이쪽에 내공이 적다 보니 들통이 날 것 같아요. 쉽지는 않은데, 어떻게든 해 봐야죠.

유 요즘 관심 가는 주제는 어떤 게 있나요?
아무래도 요즘 최고의 관심사는 이주 문제에요. 이주 노동자나 다문화 문제는 오래전부터 염두는 두었죠. 자료 조사하려고 외국에 다녀오면서 이게 21세기에 가장 큰 화두가 되겠구나, 하는 나름대로 문제의식이 커졌어요. 이건 진짜 큰 문제가 될 것이에요. 이미 유럽에서는 시작됐고요. 한국에서도 이제 막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이분들을 대하는 접근 방식이 인도주의적인 것으로 한정돼있어요. 이들도 착한 사람들이고, 친해지고 싶은데 우리가 내쳐서야 되겠느냐는 거죠. 그런데 이분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2세대를 제대로 키워내는데 거의 성공하지 못하고 있어요. 다룰 생각도 있긴 한데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좋은 텍스트가 많지 않고요.


유 만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해준다면?
자기가 경험한 모든 게 자산이 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인문대를 나왔고, 그림 공부를 늦게 시작해서 입시 미술을 안 했거든요. 그게 처음에는 되게 큰 결핍 사유였어요. 그쪽 나온 친구들은 사물을 보고 명도 단계를 탁 10개로 파악하거나, 비례를 고려해서 형태를 잡잖아요. 저는 대신 그 시간 동안 인문대에서 공부하고, 학생회에서 일했죠. 회사에 다니다 진보 단체를 기웃거렸고요. 그런데 그때 했던 경험들이 결국 지금 와서 보니까 다 도움이 돼요. 인문대에서는 텍스트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학생회나 단체 일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관점이 생겼다는 건 당연한 일이죠. 단체에서 선전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도 다 경험이 됐어요. 회사에서는 컴퓨터를 다루는 법을 배웠죠. 결국 그런 모든 작업이 하나, 하나 쌓여서 이 직업이 된 것이에요. 중간에 다른 경험을 했으면 뭔가 다른 걸 했겠죠. 무슨 경험을 해도 그게 ‘나’라는 사람이 되니까요. 어떤 상황에서건 긍정하는 게 자기가 마음에 편하고 도움이 돼요. 그게 보기에 따라서는 포기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볼 수가 있는 거죠.
 

◇오너캐=작가를 대변하는 캐릭터.
◇자크 데리다=근대까지 쌓여온 철학적 체계나 문체를 거부할 것을 주장한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