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조선왕조실록 학술심포지엄

기자명 유수빈 기자 (newbien@skkuw.com)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2월 8일(기묘) 4번째 기사에서

조선 시대 왕들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 두려워하며 실록에 간섭하려고 했다. 그러나 엄격한 실록 관리에 따라 사관은 왕에게서 자유롭게 역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덕분에 태종부터 철종까지의 조선의 역사는 오늘날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151호,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보존력이 뛰어난 한지 위에 글을 작성한 후, 책으로 제작해 보관했다. 그러나 그 중 책으로 바로 제작하지 않고, 글이 써진 한지를 밀랍으로 바른 후 건조하는 과정을 추가한 밀랍본 실록도 있다. 이는 △방수성 △항균성 △항산화성 등 밀랍의 장점으로 알려진 특성을 이용해 실록의 영구 보존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의도와 달리 밀랍본 일부는 보통 실록보다 손상 정도가 심했다. 조사 결과 밀랍본의 밀랍이 굳어 종이에 균열이 일어나거나 종이색이 변해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재원을 마련해 2006년부터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복원기술 연구 사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지난 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밀랍본 복원기술의 연구성과-되살아나는 조선왕조실록’ 학술심포지엄에서 8년간의 연구 성과를 밝혔다.

▲ 지난 5일 열린 ‘밀랍본 복원기술의 연구성과-되살아나는 조선왕조실록’ 학술심포지엄 포스터. 지난 5일 열린 ‘밀랍본 복원기술의 연구성과-되살아나는 조선왕조실록’학술심포지엄 포스터. /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밀랍본 복원의 첫 초석을 닦다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밀랍본은 총 576권으로, 세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일부가 여기에 포함된다. 밀랍본의 손상은 밀랍이 두껍게 발라진 실록일수록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훼손이 심한 세종실록 밀랍본은 손상을 일으키는 균류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특히 밀랍본의 손상이 심한 것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으로 인한 훼손뿐만 아니라 밀랍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음이 이번 연구 결과에서 드러났다. 밀랍은 녹는점이 62~63℃로 쉽게 굳거나 녹아, 균열 등의 물리적 *열화가 잘 발생한다. 또한 밀랍의 주요 구성물질인 왁스 에스테르는 △미생물 △수분 △산 △염 등 다양한 인자에 의해 쉽게 지방산과 지방족 알코올로 분해된다. 이것이 다시 분해되면서 생겨나는 산성 분해산물이 밀랍과 한지의 분해를 촉진한다. 게다가 밀랍은 통기성이 낮아 분해산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내부에 쌓이면서 열화를 일으킨다.
연구진은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밀랍 제거 기술을 소개했다. 밀랍의 녹는점을 이용해 밀랍본에 높은 열과 압력을 가하거나 여러 용매를 이용하는 방안이 제시됐으며, 그 중 가장 효율성이 좋았던 기술은 이산화탄소와 DCM를 용매로 삼아 밀랍을 녹이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밀랍을 떼어내면 종이의 강도가 떨어지고 형태가 변형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추가로 강도 보강 처리가 필요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메틸 셀룰로오스가 최적의 재료로 선정됐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에서는 밀랍본의 열화를 막을 장기적인 보관법도 제시됐다. 종이의 열화에는 산화 작용이 큰 영향을 끼친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산소를 제어하는 연구를 진행했고, 질소가스를 이용한 저산소처리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보관할 때 지속적인 환기와 적정 습도가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한 한계도 지적됐다. 모든 밀랍본이 아니라 4분의 1 정도만 훼손이 심한 까닭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문화재여서 쉽게 시료를 채취할 수 없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보존 기술 연구를 위해 밀랍본 원본이 아니라 이를 본뜬 재료를 이용해야 했다.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문화재 복원 사업
올해를 끝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밀랍본 복원 연구를 정리하고 복원 기술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전달할 예정이다. 8년의 연구를 통해 획기적인 밀랍제거 기술을 확보하는 토대는 마련했으나, 밀랍본이 실제로 복원되려면 앞으로도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한국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의 이규식 실장은 “숭례문 복원을 통하여 볼 때,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사랑과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며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국내 문화재 복원 연구와 이에 대한 인식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상태다. ‘역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에서, 역사를 기억하려면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는 것에서 나아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열화 현상=절연체가 외부 혹은 내부의 영향에 따라 화학적, 물리적 성질이 나빠지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