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기자명 이유진 기자 (nipit616@skkuw.com)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와 독재정권을 거쳐 지금까지,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결같은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권력이나 이윤을 추구하기보다,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찬 이성, 따뜻한 가슴’이라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준 변형윤 교수를 만났다. 분배 없이 성장만 추구하는 경제 정책에, 어두운 정치현실에, 분단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낄 줄 알았던 따뜻한 경제학자는 한사코 자신의 행보가 당연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왜 경제학자의 길을 선택한 건가요?
간단해. 원래 경제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내가 1927년생인데, 그 때 교육제도로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나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 나는 이과계통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색약으로 밝혀져 진학시험에서 낙방했어. 당시엔 색약이나 색맹이 있으면 이과계 학교를 갈 수 없었거든. 결국 문과계 전문학교에 지원해야 해서 서울 상대 전신이었던 경성경제전문학교에 가게 됐지. 그렇게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경기변동론 △경제사 △농업정책론 △수리경제학 등 여러 책들을 보는 도중에 그야말로 빠져든 거지. 경제학에 말이야.

▲ 이유진 기자 bejust16@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는데요
4·19 일주일 뒤에 있었던 4·25 교수시위에 참가했지. 4?19때 학생들이 데모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았겠어. 그걸 생각하면 교수들이 가만있을 수 없는 것 아니야. 물론 총을 맞거나 해직될 위험은 각오하고 있었어. 뭐 쫓겨나면 쫓겨나는 거지. 그런데 교수 데모가 이뤄지고 바로 그 다음날 이승만이 하야해서 특별히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어.
하지만 12·12사태 후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했을 때는 4년간 해직당해서 1년 동안은 글도 못 썼지 뭐야. 그래도 시국선언을 주도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아. 그건 지식인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책무였으니까. 이 때 함께 해직된 교수들과 복직투쟁을 벌이면서 민중대학을 개설하고, 5·17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광주총회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지. 그리고 해직된 지 2년이 조금 지날 무렵, 현재의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전신인 학현연구실을 차렸어.

우리나라에 새로운 이론을 많이 도입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원래 자본주의 경제학뿐 아니라 마르크스 경제학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해직당하고 나니 이 분야의 연구를 할 시간이 많았어. 해직기간은 무엇보다도 정치경제학이나 *종속이론 등 한국의 실정에 맞는 이론을 연구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는 시간이었지. 그리고 ?반(反)주류의 경제학?을 펴내 주류경제학에 비판적인 경제학의 흐름을 소개하고자 했고, ?분배의 경제학?으로도 빈곤의 문제와 비판적 경제학을 다뤘지. 그 뒤에는 경제발전론, 경제변동론 등을 연구했지.
해직 전 50년대 후반에는 △경제수학 △계량경제학 △통계수학 등을 가르쳤어. 당시에는 한국에 그런 책이 별로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수학을 잘 하는 편이었으니까 맡았지.

주류경제학에 비판적인 이론을 많이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애초부터 ‘주류경제학자라고 해도 주류경제학만 해서는 안 되고 주류경제학이 아닌 것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사뮤엘슨이라는 사람이 낸 경제학 입문서 『경제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제 3판 첫 페이지에 경제학 하는 사람은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 케인즈 세 가지를 읽으라고 돼있어. 내가 볼 때는 이 정도는 경제학도라면 기본적으로 읽어봐야 되거든. 그래야 자기한테 맞는 경제학을 선택해서 공부하지 않겠어.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강단에선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찾기 힘드니 안타깝지.

통일에 대한 의지도 큰 것 같은데요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았던 이야기를 하는 거구나. 한겨레 신문사가 뭔지 알거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주식을 공모해 모은 자본금으로 창간된 신문이었지. 한겨레 신문사를 만들 때 나도 초기주주였어. 창간위원회 위원 겸 고문을 맡았었고. 그런데 이 한겨레 신문사가 시작된 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파벌이 생겨서 내부에서 우르릉거린거야. 그래서 이사직을 맡아서 그런 상태에 있는 한겨레 신문사를 수습하는데 그럭저럭 도움을 줬지. 그러고 나서 이사를 그만두겠다고 해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을 만들면서 나를 또 이사장으로 한 거지.
통일은 당연히 해야지. 분단 상황으로 계속 가서는 안 되지 않겠어? 하나였던 거니까. 양자가 대립된 상태로 계속 갈 수는 없잖아. 같은 동포니까. 그리고 흡수통일이라는 것은 생각해서는 안 돼. 사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평화롭게 하나가 돼야 하지 않나 이거야. 갈라지기 전의 상태, 통일한 상태에서 한국이 커가야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 공동대표 △따듯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이사장 △미래에셋 박현주 재단 이사장 등 수많은 사회 공익사업에서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려운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해결해주기 위해서 그런 거였지. 경실련도 결국 그거지 뭐. 지금은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많이 생기고 그러지 않았소. 바로 경실련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시대를 열었으니 첨단을 걸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때도 경실련 대표를 했는데 대표를 해달라고 해서 맡아 준 것 뿐이야.
연탄나눔운동도 내가 일을 많이 한 것은 아니고, 부탁을 받아서 이사장직에 있었을 뿐이야. 일단은 어려운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는 일들 아니야? 마다할 건 없더라고. 난 큰 문제들, 대외적으로 누구 만나거나 중요한 문제만 해결해주면 되니까. 처음에는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시작된 사업이었어. 그런데 내가 북쪽에도 손길을 지펴야겠지 않겠냐고 해서 남북 간 연탄나눔을 하게 됐었지. 그런데 여기서 북에게 도움을 준다는 표현을 쓰지는 못하겠어. 나눠가지는 거니까. 남쪽에서 하는 식대로 북쪽에도 보내는 거니까 그냥 나누는 거지.
그리고 미래에셋 재단은, 박현주 회장이 장학금을 주는 재단을 만들겠다고 그러더라고. 아, 좋잖아. 가난한 학생들 도와주는 거… 그래서 내가 이사장을 맡았지. 10년쯤 지났으니까 이제 물러나고 다른 사람이 해야 될 것 같아서 물러났지. 처음에 이사장직 맡을 때 회장이 재단 규모를 키우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기도 했고 말이야.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원래는 경제정책을 꾸릴 때 그 두 가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성장만 중시하고 분배는 경시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어? 내가 경제학자로서 가장 영향을 받은 학자가 누구냐면 바로 알프레드 마셜이야. 마셜은 경제학을 정의할 때 ‘경제학은 부의 축적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연구의 일부분이다’라고 했지. 지금 경제학자들은 부의 축적에 관한 연구에만 치중해 있어. 경제학이 인간 연구의 일부로 돌아가려면 부의 공정한 분배를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어.

40년에 걸쳐 교수의 길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내가 어디 가서 굽손거리고 이런 거 싫어하거든…  그래서 교수가 됐으면 했었어. 그리고 교수로서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이 있었어. 장관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 없고 교수로써 살아가고 싶다. 강단에 처음 설 때 그렇게 생각했어. 유능한 교수, 유능한 연구자, 그리고 존경받는 선생. 그런 칭호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교단에 서 오다가 교수로써 정년퇴임을 맞이한 거고. 지금 내가 이런 평을 듣고 있는지, 내가 죽고 난 뒤에 들을 수 있을는지 그건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내가 죽은 뒤에라도 들을 수 있다면.’ 이게 나의 소망이야. 이런 마음으로 교단에 섰기 때문에 다른 짓을 안했다고 할 수 있겠지.

대학생들에게 …
성균관대는 내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4·19당시 성균관대에 강의를 나갔는데, 시위를 위해 몰려나오는 학생들로 인해 강의는 할 수가 없었지. 그들의 뒤를 따라가 시위현장을 봤는데, 그 때 경찰이 총을 쏴서 학생들이 다치는 것을 보고 교수들도 뭔가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됐어. 지금의 성균관대 학생들에게도 너무 공부벌레만 되지 말고 경제학에 대한 마셜의 정의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네. 인간에 관한 연구란, 실제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 되는 거야. 많이 읽으면서 세상을 보고, 계속 사람에 관심을 가지면 될 거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1980년 봄,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황을 안정화하고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저지하고자 지식인들이 발표한 선언.
◇종속이론=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이 각 국가의 경제발전 경로나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수도와 위성)으로 구성된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는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