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모(신소재09)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오늘 무슨 책을 봤는가? 혹시 오늘 본 책이 금지도서라면? 혹은 오늘 들은 음악이 사실 금지곡이고 항상 애국가만 들어야 한다면? 매일 삼시세끼를 학생식당에서만 먹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끔찍하다. 모두 자유가 박탈됐을 때의 이야기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본지 또한 축제에 관한 기사며 기숙사 관련 기사, 문화면의 예술작품에 대한 기사까지 자유와 관련 없는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자유는 우리의 생활이고 본능이며 우리의 행복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OECD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른 우리나라의 청소년 행복지수는 34개국 중 34위이다. 성공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르는 수치다. 더 포괄적인 전체 행복지수를 보면 2계단 상승해 34개국 중 32위다. 물론 행복을 수치로 나타내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 개개인은 이런 순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 거다. 다른 수치로 언론 자유도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64위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 순위 위쪽에는 아프리카국가도 있다고 한다. 충격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앞선 순위들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든지 사회적·환경적 요인 등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개인이 얼마나 자유로운가’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수치들일 수 있으나 그래도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지난 호에 게재된 김귀정 열사 추모제와 뉴스타파 기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매년 접하는 김귀정 열사 추모제는 잊고 있었던 선배들의 희생을 상기시켜줬고, 뉴스타파 기사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드러냈다. 언론의 자유도 표현의 자유의 일부분이다.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형태의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며 기반이라 했다. 사실 사회에 나갈수록 정의는 중요도의 저 뒤편으로 뒤처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안언론에 대한 관심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지난 호에 실렸던 녹색평가에 대한 기사는 우리 캠퍼스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큰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지속가능성은 환경보호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회 및 경제 시스템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고인 물이 썩듯이 시스템이 정체되거나 일회성에 그친다면 새로운 새싹은 자라나지 못한다. 우리에게 역동성과 지속가능성을 가져다주는 물과 햇빛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유를 떠올릴 때면 나는 래리 플린트 이야기가 생각난다. 래리 플린트는 ‘플레이보이’지와 쌍벽을 이루는 미국의 도색잡지 ‘허슬러’를 창간한 잡지사 사장이다. 평소에도 각종 기행을 저질러온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한 법정 싸움이었는데, 폴웰이라는 목사가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의 패러디 광고를 잡지에 게재해 초래된 다툼이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싸움 끝에 법정은 플린트의 손을 들어줬다. 수정헌법 1조인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판결의 근거였다. 우리나라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지 않은가? 플린트의 많은 어록 중에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 같은 쓰레기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보호받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서도 때론 포기하며 살아야 한다. 편하게 생각해서 그냥 조금 불편하게 살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두 팔, 두 다리 쭉 뻗고 살고 싶다.

▲ 구현모(신소재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