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훈 기자 (kikos13@skkuw.com)

   
 
양반가 자제가 어느 날 장에서 별신굿을 구경하다 아름다운 무녀에게 첫 눈에 반해 버린다. 그의 이름은 김천득, 김해 김씨 삼현공파의 4대 독자는 그렇게 동해안 별신굿 세습무가의 첫 화랭이가 됐다. 그리고 어느새 100 여년이 지나고, 동해안 별신굿의 마지막 화랭이 김정희가 태어났다. 희미해져가는 동해안 별신굿 전통의 새로운 부활을 꿈꾸는 그를 만나봤다.

김태훈 기자(이하 김) 화랭이란 무엇인가?
김정희 화랭이(이하 김) 화랭이는 세습무가의 남자무당을 칭하는 말이다. 화랭이는 굿판에서 연주나 소리를 하는 악사역할을 함과 동시에 마을과의 사전 교섭도 주관한다. 화랭이라는 말은 옛날 신라 시대 때 화랑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랑은 군사훈련도 받고, 제사도 지내고, 악기도 잘 다루는 팔방미인들이었다. 이 중에서 제사장과 악사의 기능이 지금의 화랭이로 계승됐다.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세습무의 운명을 잘 받아들였나?
무업을 이어나가라는 강요는 없었다. 부모님이 모두 세습무다 보니 나 역시도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굿판을 보며 자랐기에 자연스레 따라하게 됐고 이 일이 좋아져서 계속 해왔다. 말 그대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굿판을 다녔다. 어린 시절 악기를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며 배워가기 시작했다. 굿은 나에게 생활 그 자체였다. 남들은 어린 아이를 왜 굿판에 끌고 다니느냐고 부모님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부모님은 내가 가업을 잇는 것보다는 새로운 일을 하길 바라셨다.

보통 우리가 무당을 생각할 때 신내림을 받는 강신무를 생각하는데 다른 점은?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세습무는 신내림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강신무는 여러 잡신을 모시는 반면 세습무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초월자적인 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즉, 내가 생각하는 신이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신이고, 또 마을이 모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 신을 우리는 골매기 성황신이라고 한다. 골매기 신은 특정한 신이 아닌 초월자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어떤 마을에 풍어제를 하러 가면 마을을 수호하는 신이 있다. 그 수호신을 그 마을에서 어떻게 부르던지, 우리는 골매기신에 대한 굿을 한다. 넓은 의미로 보면 다른 종교의 신도 포함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하느님 역시 골매기신으로 부를 수 있다. 이 외에 강신무와 세습무가 행하는 굿판에서 보이는 차이점도 있지만 주로 지역 차다. 작두타기의 경우 주로 강신무가 강한 황해도에서 행해지고 세습무가 강한 남해, 동해, 진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굿의 필수요소로는 무엇이 있나?
동해안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세습무들은 △꽹과리 △바라 △장구 △징 소리로 구성된 굿판을 벌인다. 이에 반해 강신무들은 △꽹과리 △대금 △장구 △징 △피리를 주로 사용하고 가끔 아쟁도 이용한다. 장단은 세습무들이 일반적인 동해안 세습무 장단을 친다면 강신무들은 비교적 간단한 장단인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에 동해안 세습무 장단을 조금씩 섞는다. △장구 △꽹과리 △징이 특히 중요하다. 판소리에서 북치는 고수 역할을 별신굿에서는 장구가 한다. 소리를 하게 되면 장단을 짚어주는 것이 장구가 하는 일이다. 장구 장단에 △꽹과리 △바라 △징이 얹혀 어우러지며 흥을 돋운다.

굿은 무속과 예술의 경계에 서있다. 이에 대한 고민은 없는지?
어쩌면 그 고민은 나의 숙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속이라는 것은 사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남사당패나 농악패의 농악도 무속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한 행위가 예술의 형태를 띠더라도 누군가의 염원을 담으면 그것이 바로 무속인 것이다. 굿은 예전에는 예술이나 놀이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놀이판에 사람들이 모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니 일제가 무속적인 측면만을 강조해 대중연희적인 측면, 예술로서의 측면을 약화시키고 미신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제 다시 굿의 예술적인 측면도 주목해야 될 때다.

얼마 전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굿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궁금하다.
김  친숙한 소재를 가지고 젊은 사람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더 소통하려 했다. 공연 ‘신이 있는 풍경’에서 별신굿 중 마지막 무대인 거리굿의 이야기 배경을 서울로 설정했다. 도시 사람들이 갇혀있는 생활을 많이 하는 데 같이 나와서 한마당 재밌게 놀 ‘꺼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굿의 ‘소통’이라는 측면을 부각하고 싶다. 그 외에 재즈피아니스트 임동창 씨, 호주의 유명 재즈드러머 사이먼 바커와 협연을 하기도 했다. 동해안 장단을 가지고 재즈와 섞는 시도를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김덕수 선생님의 예처럼 많은 시도가 있는데, 내 경우는 꽹과리와 드럼의 조화를 시도했다. 드럼이 장구를 대체하면서도 특이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해안 장단을 기본으로 서양악기를 더하고 서양악기의 소리와 느낌에 맞춰 동해안의 선율, 호흡을 바꾼 변주로 동서의 조화를 꾀했다. 이번 공연은 생각했던 것과 맞아떨어져 만족스럽다. 사이먼 바커의 경우 영화 ?땡큐 미스터김?의 인연으로 만났는데, 이 영화는 사이먼이 故김석출 선생의 음악에 반해 선생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직접 영화화한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돌아가시기 3일전, 임종 직전에 만남이 이뤄져 음악적인 교류는 하지 못했다. 故김석출 선생님과 미처 하지 못 한걸 이번에 나와 함께 한 것이다.

 
김 굿의 어떤 점이 좋은가?
음악에 취해 한 덩어리가 되는 순간이 있다. 굿판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듯 한 그런 느낌이다. 옛날 가수들이 소위 뽕을 맞는 느낌?(웃음) 아마 그것과 일맥상통 할 것 같다. 사람이 음악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에너지와 힘이 솟아날 때가 있다. 하지만 정신만은 너무 또렷하다. 내가 무엇을 하는 지 정확히 알아야 보는 관중도 신명이 나고 즐거운 굿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굿이 아니다. 보는 사람도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어우러지는 굿이어야 모두가 하나가 돼 어우러질 수 있다.

마지막 화랭이라고 불리는데, 후계자 양성은 잘되고 있나?
후계자 양성이 매우 어렵다. 세습이다보니, 일단 핏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집 아이들은 더 이상 무업을 세습하려 하지 않는다. 내 사촌형제와 친형제도 마찬가지다. 내 대에서 세습무가의 일원으로서의 화랭이는 끝날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예술로서 화랭이 전통을 이어갈 것이다. 현재 한예종과 중앙대, 경주동대, 전북대에서 출강 중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학생들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굿을 보여주고 있다. 진짜 굿은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현장을 보며 학습해야 예술성이 그대로 존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나의 욕심은 제자들을 예술로서 길러내는 것이다. 앞으로 ‘세습되는’ 세습무라는 것은 없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화랭이와 동해안 별신굿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예술의 한 장르로서 굿을 정착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