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훈 기자 (kikos13@skkuw.com)

관상학의 기원
관상학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다만 대략 기원전 21세기 이전 하나라의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인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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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할 때 관상을 활용한 기록이 있으며,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탄생과 관련된 일화에도 관상법이 등장하고 있어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관상학의 기원을 논할 때 춘추시대 노나라의 내사 벼슬을 지낸 숙복을 시조로 삼는다. 춘추좌전에 보면 '숙복이 재상 공손교의 두 아들의 상을 봤는데 그의 예언이 뒷날 적중했다'는 기록이 있다.
관상학은 전국시대 위나라에 살았던 당거에 이르러 골상(骨狀)을 중시하는 이전의 관상학에 기색(氣色)을 포함하며 학문적 토대가 구축됐다. 이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일어났지만 이러한 관상법은 도제관계를 통해 극비리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었다. 덕분에 분서갱유에도 멸학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관상학은 이후 송나라의 달마대사가 여러 저서를 통해 정립했다고 전해지는 ‘달마상법’을 주 내용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다만 달마상법이 실제로 달마대사에 의해 지어진 것인지는 문헌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관상학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도교를 수입하며 관상학을 접했다. 그러나 중국의 관상학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은 7세기 초 신라의 선덕여왕 때다. 당시의 승려들이 달마상법을 배워 고관대작들의 상을 보고 미래의 일을 점친 얘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관상학은 불교와 연관성을 보이는데, 고려 말 승려 혜징이 이성계의 상을 보고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는 사료 역시 한 사례다.
하지만 관상학이 대개 중국에서 체계화되고 발전되어 온 만큼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만의 변용된 관상학을 정립하게 된다. 예컨대 중국은 귀를 보며 수명을 점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장수와 함께 자손의 번영을 예측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재물을 관장하는 코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고 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관상학은 코가 입술을 덮으면 패가망신할 상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관상법으로는 얼굴 각 부위의 치수를 재는 관상법이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 세조 때 한 관상가가 한명회의 상을 자로 재어 재상이 될 것을 예측한 이야기가 전한다.

서양의 관상학
연세대 설혜심 교수의 저서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에 따르면 서양의 관상학은 2,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생했다. 고대 중국의 점술이 사용한 대표적인 점의 매체가 거북이의 등껍질이었다면 고대 서양에서는 인간의 몸을 점의 매체로 삼았는데, 따라서 관상은 사제들의 몫이었다. 그러다보니 고대 서양의 관상은 예언적 성향을 보였는데, 예컨대 '비뚤어진 얼굴에 오른쪽 눈이 튀어나와 있다면,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떼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다'라는 식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관상학이 발달했는데, 이는 예언적 목적이 아닌 인간을 분석하는 목적으로 주로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됐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관상학에 크게 기여했는데, 영혼의 아름다움이 외양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즉, 내면의 변화를 통해 관상이 변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젊은이들에게 내적 성숙을 확인하기 위해 아침마다 거울을 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동물의 특질을 사람에게 적용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사자와 멧돼지는 거친 털을 가지고 있으므로 거친 털을 가진 사람은 용맹하다는 식이다. 이후 중세에 들어서며 신의 은총을 뜻하는 ‘빛’에 대한 해석으로 얼굴이나 머리카락의 색 등 색채에 대한 관상법이 시작됐다.
과학혁명 이후 관상학은 두개골의 모양을 관찰하는 골상학으로 부활하게 된다. 골상학은 두뇌 각 부위의 발달 정도와 두개골의 발달이 상응한다는 믿음에 따라 정립됐으며, 19세기 크게 유행했다. 소설가 에드가 앨랜 포는 골상학을 '과학의 황제'라고 칭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골상학은 죽은 과학으로 취급됐지만 이후에도 범죄학 등 여러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