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나쓰메 소세키는 '청춘이란 밝은 것만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아름다운 청춘과 사뭇 다른 의견이다. 우리는 늘 즐거운 청춘을 듣고 밝은 청춘을 말하고 소원한다.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청춘을 보통 20대의 시기라고 보는 것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지금 청춘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즐거운가? 늘 밝고 행복한가? 겉으로 그런 친구들이 많을지언정 속으로도 그런 친구들은 흔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매일 웃던 사람이 가끔 올리는 ‘힘들고 괴로워 울고 싶다’는 글이 이를 말해준다. 혹은 평소에 굉장히 웃기는 선배가 담배를 피우면서 힘들다고 투정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기에 그렇다.
이런 글을 올리지 않는 20대, 겉으로 힘들지 않아 보이는 20대는 마치 청춘을 잘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청춘이 어색하다. 20대가 어떻게 걱정이 없을 수 있을까? 미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른들이 말하는 호락호락하지 않는 세상이 20년이란 시간 만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이들은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는 혹은 알고도 지나치는, 자신을 속이는 자만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어둡다.
이제 청춘이 그다지 밝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청춘과 맞닿아 있는 죽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청춘은 계속해서 고민한다. 그 답을 찾을 수 있든 없든, 답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민한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서 젊은 화자는 문득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심각한 의문 하나를 갖게 된다. 그는 이를 바다에 가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잔잔하고 묵묵한 바다의 무심함에 화만 난다. 전혀 얻은 것이 없다. 이것이 청춘과 맞닿아 있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잃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청춘은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실패해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면 우리는 보통 '죽고 싶다'라고 말한다. 죽음의 상태에 이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할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마치 생명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해결하리라 생각했던 문제와 찾으리라 생각했던 답, 이 두 가지가 예상에서 빗나갔을 때 우리는 죽음의 상태에 이르며, 청춘은 늘 그렇다. 
청춘은 끊임없이 묻고 답을 갈구하며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답을 얻지 못해 절망하며 그래도 다시 노력한다. 니체가 말했든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따라서 젊음은 늘 죽음과 대면하며 방황한다. 우리가 말하는 아름다운 청춘은 어쩌면 우리의 바람일 뿐이다. 청춘이란 어두우며 미숙하다. 이러한 청춘에게 힐링이란 사치다. 어두운 청춘을 밝게 만들려는 노력은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다. 킬링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청춘의 자세다.

▲ 박연수(경영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