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필자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 보통 해가 진 후 밤이 되면 운동을 한다. 필자의 운동은 학교 정문부터 와룡공원까지 등산 하는 것이다. 학교가 높아서 그런지 수선관을 지나 올라가면 서울 야경이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빛들을 보면서 참 밝다는 생각을 한다. 약 1년 전만 하더라도 밝은 불빛들을 보면서 쓸쓸한 외로움을 느꼈다. 수많은 빛 중에 나와 함께하는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와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취를 하고 나서부터 군중 속 외로움을 자주 느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찾아갔다. 그리고 막차 시간이 될 때까지 놀다 집에 들어오면 바로 잠들기 바빴다. 그렇게 정말 피곤한 생활을 했지만 정작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대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그 순간에도 답답함을 느꼈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듯한 느낌. 타인과 이야기 하지만 마음이 꽉 막혀 통하지 않는 듯한 느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에도 외로움을 느끼다 보니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은 정말 미칠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 고통 때문에 모임을 찾고, 하지만 거기서 또다시 외로움을 느끼고 다시 모임을 찾고 외로움을 느끼고. 뫼비우스의 띠 같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악순환이 지속됐다.
이런 악순환에 지쳐 있을 때, 포근한 안정감을 느끼게 됐다. 이런 안정감을 준, 뫼비우스 띠를 잘라준 사람은 친구였다. 그동안 혼자 있는 게 싫어서 그냥 ‘사람’이 있는 곳이면 무조건 나갔다. 마음이 통하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정한 친구와 단 둘이 있자 오히려 그동안의 모임에서 느꼈던 외로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모임을 찾기 보다는 친구를 찾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지나가다 반갑게 인사하기. 공강 시간에 만나서 교수회관에서 와플 먹기. 수업 끝나고 노래방 가기. 혜화역까지 데려다 주기.
분명 예전에 내가 찾아다니던 모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훨씬 적은 인원과 공유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을 더 적은 숫자의 사람들과 깊게 공유했다. 지나치다 마주쳐도 즐겁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웃으며 이야기 하고,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지는 못 하지만 가만히 들어주고. 친구와 함께한 한 시간은 24시간 지속되는 행복 바이러스를 선사해 줬다. 그리고 나의 군중 속 외로움이라는 병은 서서히 고쳐졌다. 그리고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됐다.

▲ 조가은(경제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