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 속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자명 김태훈 기자 (kikos13@skkuw.com)
히로코는 2년 전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이하 이츠키)의 철거된 옛 주소로 편지를 보냅니다. 마치 천국에 보내는 듯,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련하게 보낸 잘 지내냐는 편지. 하지만 그녀는 얼마 후 답장을 받게 됩니다. '감기기운이 조금 있지만, 잘 지내고 있어요?' 놀랍게도 그 집 주소에는 죽은 후지이 이츠키와 동명인 그의 중학교 시절 여자 동창(이하 후지이)이 아직도 살고 있던 것이죠. 영화 ‘러브레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 이츠키가 빌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반납하는 후지이. 미래에 다시 만난 이 책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둘은 이후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후지이는 편지를 통해 지금까지 잊고 있던 이츠키와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시절, 서로가 사랑했음을 깨닫고 눈물 흘리게 되죠. 영화의 마지막에 후지이가 이츠키와의 사랑을 깨달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도서부 후배들이 건네준 소설 한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먼 옛날 이츠키가 이사가며 대신 반납해달라고 전해준 이 책의 대출증 뒤에는 그녀의 중학생 시절 아름다운 모습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죠. 
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무려 15년간의 세월을 걸쳐 집필한 4000쪽에 달하는 대하소설입니다. 작품은 그 분량에서 볼 수 있듯이 세밀한 전개와 잘 다듬어진 문체로 가득해요. 얼마나 세밀하던지 7권으로 이뤄진 이 소설의 첫 권에서는 마르셀이 침대에서 뒤척이는 장면을 위해 30쪽이나 사용했을 정도죠. 소설 속 화자인 마르셀은 마들렌을 먹다가, 잊고 있던 작은 마을 콩브레에서의 유년시절 휴가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게 됩니다. 마르셀은 다시 찾게 된 시간을 오래 남겨두고자 기억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소설은 콩브레에서 보낸 그의 유년의 기억에서 시작하여 그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 청년시절의 기억, 결혼생활에 대한 기억과 아내의 죽음 등을 거쳐 현재의 그가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는 처음 부분으로 회기하며 끝이 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러브레터’에서 주인공은 모두 현재의 경험을 통해 잊고 있었던 과거를 현재의 나로써 다시 체험하게 됩니다. 후지이는 히로코와의 편지를 통해, 마르셀은 마들렌을 계기로 과거를 보게 되죠.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르셀이 무려 4000여 쪽을 돌아오며 얻은 깨달음은, 우리의 자아가 시간 속에서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인 스완, 오데트, 질베르트 등이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셀은 인간의 자아 대신 예술작품에 기억을 정착시켜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러브레터의 또 다른 주인공인 히로코 역시 연인이었던 이츠키를 설원에서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며 놓아주게 됩니다. 후지이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츠키와의 추억을 잊고 살아가게 되죠. 하지만 히로코와의 편지로 비로소 이츠키와 사랑했음을 알게 됩니다. 편지가 마치 마르셀의 소설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셀이 인생을 모두 돌아보는 동안, 후지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그 소설책을 손에 든 그 순간까지, 시간은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그들을 스쳐갔던 것이니까요. 어쩌면 우리도 후지이처럼 이미 기억 속에 연서 하나씩을 품어 두었을지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 각자의 때를 만나면 피어날 연서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