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나영인 기자 (nanana26@skkuw.com)

 
서울시 은평구에는 아주 특별한 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이 있다. 언뜻 보면 여타 의료생협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국내 유일 ‘여성주의 의료생협’이다. ‘여성주의’와 ‘의료생협’. 이 둘의 범상치 않은 만남은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살림)’을 만들어 냈다. 2012년 2월 창립한 살림은 현재 1200여 명의 조합원과 함께하고 있다.

▲ 살림의원의 내부 모습. 살림조합원이 아닌

 일반인들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살림의료생협 제공

새로운 주체,
의료 ‘대상’에서 ‘주체’로

“내 몸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살림 조합사무국 박은지 주임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의료체계에선 사람의 몸을 개별적 권리주체가 아닌 의료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기준으로 질병의 증상을 진단하고 처방해왔다. 그러나 살림에선 ‘우리 마을 주치의’라는 슬로건에 맞게 다양한 개인의 특성을 고려해 진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진료 시간도 길다. 일반 병원에선 길어야 3분 안에 진료가 끝나지만, 이곳에서는 10분이 기본이다.
아토피 피부염을 앓는 기자가 직접 진료를 받아봤다. △언제부터 아토피가 있었는지 △기자의 생활습관은 어떤지 △그동안 어떤 처방을 받아왔는지 등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나눴다. 추혜인 원장은 기자에게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생활습관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스테로이드 연고 사용법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진료를 받는다기보다 내 몸에 대해 의사와 수다를 떠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살림 조합원 최봉섭 씨는 “나에게 맞는 진료를 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 안심된다”고 개인별 맞춤 진료에 대해 만족해했다.

새로운 의료,
여성주의가 의료에 스며들다
살림은 더 나아가 개인의 건강이 사회의 성별불평등 구조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대해 고민한다. 의학계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경험은 끊임없이 비정상으로 간주돼 왔다. 예로, 갱년기를 에스트로젠 결핍증으로 명명하며, ‘PMS(월경 전 증후군)’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여성의 월경을 질병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지 1541호 참고) 또한 여성의 몸에 대한 무관심과 젊고 아름다운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성별 규범은 높은 제왕절개 시술률 및 *이쁜이 수술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박 주임은 “여성주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 다양한 삶의 측면에서 발현될 수 있다”며 “이런 불평등한 의료체계를 여성주의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전인격적으로 건강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림은 기존 의료체계에서 주체가 되지 못했던 △비혼 여성 △성소수자 △다문화 결혼 이민 여성 등을 고려해 진료한다. 예로, 산부인과에서는 여성이 이른바 ‘아줌마’에 분류되는 나이가 되면, 당연히 삽입섹스의 경험이 있고 기혼일 것으로 생각하며 진료한다. 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들에게 다른 몸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살림에서는 개개인의 이런 특수한 상황을 배려하는 진료를 한다. 실제로 살림에는 매일 5명이 넘는 성소수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새로운 관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건강해지자
살림은 이런 진료 이외에도 △건강 교육 △건강 소모임 △운동 프로그램 등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살림의 운동 프로그램은 그룹운동을 원칙으로 한다. ‘기계가 아닌 관계로 건강해진다’는 살림의 모토에 맞게 그룹운동으로 사람들과 함께 건강해지는 공동체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로, 대사증후군 위험인자를 가진 조합원들을 위한 ‘건강실천단’과 근력 운동이 필요한 여성 노인을 위한 ‘근육 있는 할머니들’ 등이 있다. 또한 살림 안에는 △반찬 만들기 모임 ‘밥앤찬’ △걷기 모임 ‘풋풋’ △반려동물 모임 ‘반반’ 등 11개의 소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이런 소모임들을 통해 조합원들은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건강하자’는 살림의 모토를 실현하고 있다.
살림은 현재 사회적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을 준비 중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조합원만의 이익이 아니라 지역 전체 등 모두를 위한 사회적 목적을 지닌 협동조합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된다면, 지역과 상관없이 전국의 모든 사람이 살림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주체, 새로운 의료, 새로운 관계를 통해 진정으로 함께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살림의 날갯짓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