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종윤 기자 (burrowkr@skkuw.com)

‘세종 때에 평안도 철산군에 한 사람이 있으니 성은 배요 명은 무용이니 본래 향족으로 좌수를 임했으니~’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의 첫 부분을 읽어주겠다던 그는 난데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전기수가 음을 넣어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그의 목소리는 나이에 맞지 않게 청아했다. 우리나라 마지막 전기수로 불리는 정규헌 선생을 만나 전기수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우리 시대 마지막 전기수인 정규현 선생. 이영준 기자 spiritful@

전기수 일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난 8살 때 한글을 배웠어. 지금 시대야 그 나이에 영어 알파벳까지 외우지만 나 때는 일제강점기라 우리말 배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어. 일제가 한글을 못 쓰게 했거든. 그런데 나는 전기수였던 선친으로부터 몰래 한글을 배웠지. 해방되고 나니 한글로 된 책은 넘쳐나는데 정작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때부터 마을에서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어르신들께 책을 읽어드렸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책 읽어 주는 일을 하게 됐지. 아마 선친께서도 내가 당신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책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글을 가르쳐주셨던 것 같아.

전기수는 어떻게 책을 읽나요?
일반 사람한테 책 읽으라고 해봐. 더듬더듬 읽지. 우리 같은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아. 게다가 음악적으로 읽지. 전기수로서 책 읽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내는 소리부터 달라.

음악적으로 읽는 방법에 정형화된 틀이 있나요?
그렇지는 않아. 예전에 문화재 등록할 때 나를 심사했던 교수가 악보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 그런데 이 많은 소설의 글자 하나하나에 어떻게 악보를 그려? 그리고 책은 전기수 마음대로 읽어야 해.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에 맞춰서 다르게 읽어야 하고 말이야. 고정적인 악보가 불필요한 셈이지.

전기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남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 옛날 사람들한테 책은 교과서였어. 책을 통해 지식뿐 아니라 권선징악과 사필귀정 같은 도덕적 교훈도 배웠지. 그런데 글을 모르면 이런 것을 배울 수가 없잖아. 그런 사람들에게 글을 아는 내가 책을 읽어줌으로써 책 속의 지식과 예절 등을 알려주는 거지. 그리고 보통 학생이 선생한테 돈 주고 배우잖아. 책 읽어주는 것도 지식을 전달하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나는 대가를 받지 않아. 왜? 품앗이나 두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나눔의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야. 물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이거지. 그런 면에서 전기수 문화에는 우리나라 고유 나눔의 정서가 잘 나타나.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만이 듣는 사람을 위해 책을 음악적으로 읽어주는 문화를 갖고 있어. 그런 의미에서 전기수가 갖는 문화적 의의가 결코 사소하다고 볼 수 없지.

마지막 전기수로서 앞으로의 계획은요?
사실 이 일이 경제적으로 전망이 밝지 않아. 돈도 안 되고 남들도 안 알아주고. 그러다 보니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여럿 있었지만 다 떠났어. 요즘은 주말마다 자식들 붙잡아 가르치고 있어. 어떻게든 남겨야지. 녹음 작업도 하는 중이야. 그런데 이게 한 번 녹음할 때 거의 일주일이 걸려. 게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아. 작년에 장화홍련전, 올해 홍길동전, 지금까지 두 개 했어. 그래도 이번에 홍길동전 녹음할 때는 계룡시에서 지원을 많이 해줬지.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많이 녹음할 생각이야. 내가 옛 어른들로부터 책 읽어주는 소중한 우리 문화를 물려받았듯이 나도 후대에 이 문화를 알리고 싶어. 우리 학생들도 전기수가 계승될 수 있도록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고전소설 모습.   이영준 기자 spiritful@
 

 옛 삼국지 모습.   이영준 기자 spirit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