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장서인(사과계열13)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말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인민) 스스로에 의한 통치다. 그렇다면 선거를 할 때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는가? 아니다. 선거에 관심을 가져 봤자 그놈이 그놈이고, 정책은 거기서 거기다. 정치인들의 정책은 늘 다수 서민을 위해 세워지지만, 소수 부자를 위해 집행된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정치에 대한 불신만 쌓여가고, 결국 무관심해진다.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물질적 풍요는 커져만 간다는데, 그 풍요는 우리 집만 빗겨간 것 같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도망가 버린 것일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필요로 발전했다. 자유로운 개체적 소유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계급적 이념인 ‘자유주의’와, 신분제적 정치질서에 대항해 참여의 권리를 확장하려는 이념인 ‘민주주의’는 그 목표와 방향이 일치했고, 자본주의가 꽃피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두 이념은 충돌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결과물을 나누려 했고, 부르주아는 자유주의를 통해 결과물을 독점하려고 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가두어 결과물 독점에 성공한다.
민주주의 이념의 제도화는 자유와 평등개념을 한정시켜 다수의 권리를 제한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자유를 대표 선출의 자유로, 사회적 평등을 정치적 평등으로 축소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누구나 대표로 출마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고, 정치적 평등을 통해 경제적 평등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타당하지 않은 비판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는 교묘한 속임수다. 이미 사회에서 교육받는 조건이 불평등하게 구조화돼 있기 때문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돼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선출된 대표자가 공적 이익이 아닌, 특정 계급을 위해 일을 해오면서 경제적 불평등은 계속 확대 됐다. 자유민주주의는 대중을 향한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를 넘어서서 온전한 능동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이념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경제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자유주의 내에서의 또는 외에서의 대안이든 계속해서 상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상상의 시작은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공부하며 느끼는 답답함과 절망감에 공감한다. 하지만 역사는 한 번도 자연스럽게 흘렀던 적이 없다. 늘 의도적으로 구성돼 왔다. 이제는 우리의 의도에 따라 역사를 바꿀 차례다. 그렇다고 대안적 체제를 제시하고 바로 실천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고민해야만 가장 좋은 해결책이 나오고, 해결책을 이행해갈 수 있기에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현실의 한계를 두려워하지 말고 꿈꾸고 상상하라.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이란 없다”고 말했다. 당신은 자유민주주의 기차 위에 탄 승객이다. 그 기차는 당연하지도 공정하지도 중립적이지 않은 곳이다. 내가 몸을 맡긴 기차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그리고 기차 바깥의 세상을 상상해보자. 자, 이제 우린 기차 위에서 뛰어내릴 준비가 됐다. 잃어버린 민주주의를 되찾아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