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섭 6·25종군기자 회장 인터뷰

기자명 배공민 기자 (rhdals234@skkuw.com)

외국의 종군기자를 만나봤다면 이번엔 우리나라의 종군기자를 만나볼 차례다. 한영섭 기자는 6·25전쟁 당시 KBS 중앙방송국 입사 1년 차의 병아리 기자였다. 해방 직후 38선에서는 남북 간의 소규모 전투가 늘 벌어졌다. 이런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반적인 기자 교육만으로는 제대로 된 취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육군사관학교의 종군기자훈련을 받았는데, 2주간의 혹독한 군사교육을 받은 한영섭 기자도 그 이후 전장을 누비며 6·25의 참상을 생생히 전달했다. 한국전쟁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한영섭 기자의 회고에 귀 기울여보자.
▲ 한영섭 기자가 6.25가 발발했던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은정 기자 ejjang1001@

6·25의 종군기자들, 오뚝이처럼 일어서다
6월 25일 아침 국방부 장교가 방송국에 가져온 보도 자료는 너무나도 허술했다. 이에 한 기자와 방송과장은 국방부 국장을 만나 원고를 다시 작성했다. 이 원고가 바로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리는 국내 최초의 원고였다. 이 원고를 가지고 위진록 아나운서가 최초로 전쟁의 시작을 보도한 것이다. 서울에서 남북한의 격전을 발 빠르게 전달하던 KBS 방송국은 인민군의 공세에 6월 28일 첫 피난을 시작했다. 방송국 직원들은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또 밀리고 밀려 대전까지. 기자들은 대전방송국의 취약한 여건 속에서도 방송을 쉬지 않았다. 이후에 대구로 내려가고 부산까지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지역에 있는 송신시설을 이용해 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위태위태하던 순간 들려온 인천 상륙작전의 승전보! 이 결정적인 작전 성공으로 방송국 직원들은 모두 서울로 다시 올라갈 수 있었다. 서울의 방송국은 전쟁의 상처로 처참히 부서졌지만 한 기자를 포함한 직원들은 남아있던 연희송신소의 송신시설과 스튜디오를 이용해 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한 기자가 목격한 전쟁의 참상
서울로 올라온 한 기자는 군부대를 따라 전장의 심부로 파고들어 갔다. “10월 1일부터 국군과 유엔군부대를 따라 북진하며 취재를 했죠. 서부전선에서 평양탈환 기념식을 할 때는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총칼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복판을 눈에 담는 것이 순탄할 리 없었다. 한 기자가 군부대와 함께 산악지대를 지날 때였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부대원이 한 기자에게 속삭였다. “자세를 낮추십시오.” 그 순간, 양쪽 산비탈에서 총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한 기자의 뇌리에 남쪽 어딘가에서 피난 중이실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쿵!’ 둔탁한 소리가 트럭을 울렸다. 쓰러진 사람은 그에게 자세를 낮추라 일러줬던 바로 그 병사. 한 기자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던 것은 사방을 향해 미친 듯이 총질을 해대는 것뿐이었다.
10만의 피난민을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의 현장. 한 기자는 먼저 철수할 수 있었음에도 이 참상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흥남에 남아 목숨을 걸고 취재를 계속했다. 그는 영하 20도를 밑도는 강추위 속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올라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마지막 배를 한꺼번에 타려다 바다에 곤두박질치는 사람, 철문에 끼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기자의 사명
한 기자는 종군기자가 전쟁의 실상을 보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목선을 타고 서해 5도를 돌며 확성기로 전쟁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전쟁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비참한 참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한 기자. 구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한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며, 전쟁세대가 아닌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가슴 울리는 한마디를 전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