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시스 9기 수강생 대담

기자명 이종윤 기자 (burrowkr@skkuw.com)

교육에는 목표가 있다. 성프란시스도 인문학을 통해 노숙인에게 새 삶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한다. 궁금했다. 노숙인들은 과연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래서 직접 들어봤다. 그들은 누구이며 인문학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 성프란시스 9기 수강생들이 그들이 배운 인문학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김은솔 기자 eunsol_kim@

성프란시스에 오기 전 삶은 어떠셨나요?
 정원조(이하 정) : 나는 탈북자다. 2002년 한국에 왔다. 정부에서 준 정착 지원금과 주택 보증금을 2년 만에 다 날린 후 일용직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충북 제천에 있었을 201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술을 먹고 여관비를 다 날렸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올라와 한 달여 간 알코올 기운을 달고 살았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추운 탓도 있었다. 그러다 다시서기로 오게 됐다.
김철수(가명, 이하 김) : 2011년 7월에 서울역으로 왔다. 서울역에서의 일주일은 절망적이었다. 잠깐 잠든 사이에 가방이며 신발이며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거기서 만난 사람에게 담배를 사 주다 그나마 갖고 있던 십여 만 원을 소진했다. 이후 삶을 거의 포기했다. 그러던 중 은철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는 질책을 당하고 조금씩 변했다.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자활 프로그램도 지원하고, 병원을 찾아가 치료도 받았다. 그리고 성프란시스를 찾았다.
최창복(이하 최) : 13살 때 가정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싸움을 일삼아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어가게 됐다. 교도소를 출소하면서 새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청주의 한 중국집에서 무일푼으로 일하며 요리를 배웠다. 14년의 주방일 끝에 포장마차를 열었다. 3년 정도 장사가 잘 됐지만, 도시 개발계획으로 갑작스레 폐업했다. 모든 것이 막막했다. 모아둔 돈이 있었지만,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이가 50세를 넘기면서 취직도 잘 안 됐고, 가게를 차리자니 돈을 날릴 것 같았다. 걱정 끝에 서울에 올라와 일용직 일을 하며 떠돌다 이곳에 왔다.

성프란시스에 지원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김 :
사실 여기 오게 된 건 일자리 때문이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일자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재신청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번거로웠다. 매번 부탁해야 하고. 성프란시스를 다니면 확실하게 일자리는 보장된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
최 : 이곳에 오기 전에 자활 근로를 통해 병원 쪽에서 일했다. 거기서 성프란시스 졸업생을 만났다. 인문학이 뭔지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공부도 해 보고 싶었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지원했다.
정 : 북한에 있을 때 극단을 했던 경험으로 작년에 노숙인 연극팀에서 연극을 했다. 다시서기에서 기획한 연극이었다. 연극 활동을 하다 성프란시스를 알게 됐다. 그때부터 인문학을 하고 싶었다. 인문학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이것도 학문이니 자본주의 남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할까 싶었다.

인문학을 배우면서 느끼는 변화가 있으신가요?
정 : 자기표현 하는 방법을 몰랐고, 자기표현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표현하는데 스스럼이 없다. 나를 비롯해 여기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열고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나 자신한테 당당해졌다.
최 : 한마디로 용기를 얻은 것이다. 이전에는 남 앞에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워서. 사용하는 언어도 달라졌다. 누굴 부를 때 “이 새끼야” 같이 거친 말을 썼는데, 지금은 부드럽게 말한다. 옛날보다 사람들도 덜 의식한다. 사람들 많은데 가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하게 가고 싶은 데 간다. 얼마 전에는 뮤지컬 공연을 보고 왔다. 젊은 사람들 틈에서 함께 박수 치고 웃는다는 게 우리에겐 있어서 최고의 변화다. 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김 : 오랜 세월 사람과의 관계를 피했다. 이곳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닫아놨던 마음을 열게 됐다.

졸업 후 새로 갖게 된 계획이 있으신가요?
정 : 졸업하면 자활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 살 계획이다.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질 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긴 문제다. 성프란시스를 나온다고 해서 당장 어떤 직업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다만, 당당함을 배웠기 때문에 사회를 다시 마주했을 때 좀 더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 같다. 소박한 꿈이 있다면 노숙인 연극단이 좀 더 커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고정적인 예산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최 : 열심히 살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졸업하고 열심히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예전처럼 산다. 나는 조리사 자격증이 있다. 아직은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요리를 계속 할 생각이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
김 : 우선 잠자리라도 서울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졸업할 때쯤 성프란시스에서 연결해 준 일자리 계약도 끝난다. 예전에 장사했기 때문에 졸업 후에 다시 장사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가 있다.

성프란시스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요?
정 : 친구가 생긴 것이다. 진짜 친구. 성프란시스 9기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같이 등산도 가고 공연도 보고 함께 생활하다 보니 정말 친해졌다.
김 :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사실 여기까지 올 정도면 인생이 좀 잘못된 거다. 그런데 인문학을 배우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생각 하면 힘들지만, 여기에 친구들이 있어 큰 의지가 된다. 서로 대화하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다. 그들이 내게 어떻게 살라고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면서 삶의 방향이 잡힌다.
최 : 친구 생긴 게 정말 제일 좋다. 교수님들도 항상 그런 말씀을 하신다. 9기가 단합이 정말 잘 된다고. 졸업해도 기억에 정말 많이 남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