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10여 년 전에 ‘취화선’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조선 후기의 장승업이라는 화가를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칸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인기도 많았습니다.
영화에서 장승업이 고주망태가 돼 자다가 깨어 지난밤 취기에 그린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감탄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저는 임권택 감독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감독님은 만취상태에서 영화 찍으세요?” 이런 이야기가 일반 대중에게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미술은 우리 사회에서 무협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봅니다. 타고난 무골(武骨)이 기연(奇緣)을 만나 일거에 내공이 삼갑자(三甲子)에 이르듯이 천재가 술 취해서 갑자기 영감을 받아 일필휘지

     
 
(一筆揮之)로 걸작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인사불성인 채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확률은 로또 수준입니다.
영화 속 장승업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작가가 되려면 죽어라고 쿵푸(工夫)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 말입니다. 쿵푸란 몸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미술도 쿵푸입니다. 현대미술이 아무리 개념적이라 해도 밑바탕에는 대상을 만나고 물질을 다루는 몸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모임에서 어느 물리학 교수님께서 “영감은 연구에서 나온다. 책을 읽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술적 영감 역시 작업을 하는 중에 나옵니다. 책이 소용없다는 게 아니라 먼저 명확한 문제꺼리가 있고 그것의 해결을 모색하는 실질적인 과정(Problem-solving)에서 새로운 발상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창작활동이란 대상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하찮아 보이는 삶의 패턴일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하여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재료(물질)를 다루어 재현(re-presentation) 또는 표현(expression)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예술적 과정은 물질과 정보를 탐색하고 재구성해 체계화시키는 지적 활동의 과정과도 겹쳐집니다. 따라서 예술적이면서도 지적인 창작의 과정은 손과 몸뿐만 아니라 머리 그리고 마음까지도 관여하게 하는데, 이게 바로 온몸으로 배우는 ‘공부(工夫, 쿵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잔이 “나는 더 잘 그리기 위해 더 잘 알아야 하고 더 잘 알기 위해 더 잘 그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뜻한 바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의 쿵푸는 오감(五感)을 총동원해서 대상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영국 화가 터너는 폭풍우 치는 밤에 배의 마스트에 자신의 몸을 묶고 밤새도록 파도와 바람에 시달린 후에 폭풍이 부는 바다풍경을 그렸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사물이든 현상이든 우리가 온 몸으로 부딪히고 마주치며 무언가를 발견하는 행위는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쌓아두는 공부와는 달리 대상의 놀랍고도 흥미로운 구체성과 개별성을 파악(把握, 잡아 쥠)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들의 글씨체는 거의 비슷합니다. 네모 안에 또박또박 삐뚤빼뚤 씁니다. 수없이 많은 글씨를 쓰고 나서야 각자 고유한 글씨체가 생깁니다. 그림의 스타일도 그런 식으로 생깁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습은 내가 머리로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표현을 가능하게 합니다. 대상에서 발견한 것, 재료(매체)에서 우러나온 것, 몸에서 다듬어진 것이 어우러져 작가의 독창적 스타일이 됩니다.
마우스를 클릭해서 쉽게 얻은 정보들을 훑어보거나 선생님이 낱낱이 분해해서 먹기 쉽게 차려 놓은 지식의 파편들을 이유식처럼 떠먹는 식의 공부에는 대상에 대한 감성적인 경험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술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 생명 그리고 사물과 물질의 감정까지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합니다. 온 몸과 맘으로 세상과 감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내 몸을 움직여서 내 작품을 만드는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 윤리적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내가 움직인 만큼만 이뤄지는 정직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노동이 점점 더 조직화되고 타율적이 되는 세상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공성훈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