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김금예 이영완 부부

기자명 나영인 기자 (nanana26@skkuw.com)

반촌사람들
우리 학교 주변 대학가에서 학우들과 오랫동안 교류해온 영세 상인을 인터뷰하는 코너입니다.

집 떠난 자취생과 고시생에게 가장 그리운 것은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집밥과 관심이 아닐까. ‘반촌 사람들’의 첫 주자는 자취생과 고시생의 외로움과 허기를 달래주는 김금예(70), 이영완(73) 부부다. 명륜동에서만 40여 년, 하숙은 20년 넘게 해오며 외로운 하숙생들의 어머니로서 우리 학교의 역사를 함께해온 그들을 만나봤다.

▲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영완, 김금예 부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한영준 기자 han0young@

하숙생 모두 공부하러 나가버린 점심시간, 텅 비어 조용한 하숙집을 찾았다. 하루 중 정오부터 3시간 남짓한 이 시간만이 김 할머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시간이다. 김 할머니의 하루일과는 고시생과 흡사하다. 동도 트기 전인 새벽 5시에 일어나 20인분의 아침 식사 준비를 끝내면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그녀를 기다린다. 공부하느라 바쁜 학생들을 위해 직접 빨래와 청소를 하고 나면 오후 12시. 잠시 쉬었다가 오후 3시가 되면 장을 보고 다시 저녁준비에 들어간다. 늦게까지 저녁 먹는 학생들을 챙겨주고 정리하다 보면 매일 자정이 돼서야 잠이 든다.
22년 전, 사 남매의 교육비를 벌고자 시작한 하숙은 이렇게 그녀의 일상이 됐다. 당시 학교 정문 앞에 세를 얻어 시작한 하숙은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하숙생이 30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다 집을 비워주게 되면서 2007년 지금의 양현관 근처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현재 부부와 함께 생활하는 ‘아들’들은 13명. “아침에 눈 뜨면 매일 보고, 같이 생활하니까 다 내 자식이지.” 말썽부리는 하숙생은 없느냐는 물음에 김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다들 정말 착해서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며 활짝 웃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 덕분일까. 하숙생들은 이곳에서 한번 머물면 다른 자취방이나 하숙집으로 옮겨가지 않는다고 한다. 군대에 가더라도 제대하고 다시 이 하숙집으로 돌아올 정도다.
부부는 광고를 하지 않고 오직 입소문으로만 하숙생을 받는다. 하숙생이 방을 나가게 되면 주변 학생에게 소개하기 때문에 방이 비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입소문의 비결은 ‘맛있는 집밥’이다. 매일 장 본 재료로 화학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만든 집밥은 하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내 자식 같은 아이들 밥이라서 굳이 돈 남기려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김 할머니는 공부하느라 힘든 학생들에게 삼겹살과 수육과 같은 고기반찬을 자주 해준다. 이렇다 보니 소문이 널리 퍼져 하숙생이 아닌 학생들에게도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고 있다. 작년에는 양현관 학생 30명이 김 할머니의 집밥을 먹었다.
부부가 명륜동에서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40여 년. 1982년 수원캠퍼스가 생길 때부터, 판자촌이던 명륜 3가에 쪽문이 생기면서 대학가가 되기까지 부부는 우리 학교의 역사를 함께했다. 부부가 기억하는 과거 학생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할아버지는 “당시에 제일 데모를 많이 하는 학교가 성대였지. 한창때는 매일매일 시위하고 그랬어”라며 말을 시작했다. 이어 “지금처럼 공부에 그렇게 매달리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던 거 같아. 어찌나 술을 먹고 다니는지 동네 사람들이 ‘막걸리 학교’라고 불렀다니까”라며 웃었다.
학교가 변한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자취촌의 풍경도 달라졌다. 그 많던 하숙집이 사라지고 원룸으로 개조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하숙은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번거로운 데다 물가가 오르면서 밥값을 감당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부가 하숙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자식 같은 학생들하고 지내는 게 너무 즐겁고 재밌어.” 그렇다고 이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흐른 세월만큼 체력도 떨어져 매일 장을 보고 수십 명의 밥을 짓는 것이 벅찰 때도 많다. 그럼에도 김 할머니는 학생들이 고시에 합격하거나 취직해 이곳을 나갈 때면 힘든 것도 잊을 만큼 보람을 느낀다. “잘 돼서 나간 후에 인사하러 가끔 찾아오는 아이들 보면 너무 기분 좋지.” 그동안 이곳에서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셀 수가 없을 정도. 할머니는 이곳이 터가 좋은 것이 분명하다며 환히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