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식어가 사라진 자리, 현대인의 색채로 채우다
수식어가 사라진 자리, 현대인의 색채로 채우다
  • 김태윤 기자
  • 승인 2014.03.03 18:02
  • 호수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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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안오피의 작품 ‘Walking in Sinsa-dong’ / 김은솔 기자 eunsol_kim@skkuw.com
     
 
 
두 명의 사나이가 서 있었다. 낡은 파나마에 모시 두루마기 노랑 구두를 신고, 손에 조그만 보따리 하나조차 들지 않은 그들을 소설가 구보는 무직자, 금광 브로커라고 단정한다. 구보는 일제 강점기의 도시 서울을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근대 도시의 모습, 그리고 그곳을 거니는 군중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로부터 80년 후. 영국의 팝아티스트 줄리안 오피는 현대의 서울, 신사동과 사당동을 거니는 군중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말미암은 픽토그램 예술을 탄생시킨다.

초여름, 살짝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늦은 6시. 퇴근 인파로 북적이는 사당역 주변. 이 때, 우산을 받쳐 든 양복 입은 중년 신사의 이목구비가 과감히 삭제된다. 깊게 팬 미간의 주름, 콧잔등에 튀긴 빗방울, 와이셔츠 소매의 구김도 함께 사라진다. 남은 것은 단순화된 몸의 형태 묘사와 이를 둘러싼 검정 테두리, 그리고 그 안을 꽉 채운 선명한 색채뿐. 줄리안 오피의 ‘Walking in Sadang-dong in the rain’이다. 줄리안 오피는 인물의 정체성이 최소한으로 남을 때까지 형태를 단순화시킨다. 인물을 둘러싸고 있던 화려한 수식어와 사소한 군더더기들은 과감히 생략돼 △점 △선 △면으로 환원된다. 그는 감수성이 배제된 외적인 ‘신체’에 집중함으로써 보편화된 익명의 군중을 말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작품에선 익명의 개인이 가진 ‘특수성’ 또한 살아난다. 우리는 거리를 거닐며 무의식적으로 어떠한 포즈를 취한다. 출근 시간 지하철 속에서 삐뚤빼뚤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내, 가슴을 꼿꼿이 내밀고 두 팔을 억세게 흔들며 걷는 중년 여성.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개성이 드러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매무새, 걸음걸이, 자세의 조합에서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것은 그 인물 고유의 캐릭터이자 에너지가 된다. 그는 고도의 단순화를 통해 상호 모순돼 보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공존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작품 속의 실마리를 포착해 익명의 캐릭터를 추측해 보는 것이 바로 이 전시의 묘미. 민소매 여성의 쇼핑백을 보자 방금 디오르 샵에서 신상을 ‘겟(get)'한 쇼퍼홀릭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자를 눌러 쓴 채 스마트폰을 보며 느긋하게 거니는 젊은 청년의 모습에선 곧 집어들 테이크아웃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연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모여 도심 한복판의 군중을 이룬다. 그리고 그 모습은 바로 현대인의 보편적 자화상이며, 줄리안 오피는 낯선 군중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춤’ 속에서 무언의 에너지를 포착한다.
색채감 있는 서울의 보행자들과는 달리 런던의 보행자들을 담은 LED 동영상은 흑백의 단순한 색감으로 처리된다. 군중들의 ‘움직임’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연상시키듯 옆모습만으로 표현된 작품 속엔 조용하고 일상적인 군중의 움직임이 있다.
발걸음을 옮겨 K3관으로 향한다. 방금까지 이목구비가 과감히 생략된 작품을 만났다면, 이곳의 작품은 얼굴 자체, 표정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신석기 토템상이 연상되는 거대한 얼굴 조각 두 점, ‘Lily’와 ‘Finn’. 어찌 이목구비의 부드러운 굴곡에 매료당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농축된 레진으로 제작된 입체적인 굴곡과 세밀한 명암 표현이 두드러진 이 조각의 주인공은 바로 줄리안 오피의 실제 이웃 남매. 조각에 드러난 우수 어린 표정, 이것이 환기하는 연약한 감성은 인물의 내밀한 성격뿐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세부적인 사연까지 유추하길 유혹한다.
절제와 직관성이라는 밑바탕 위에 예술적 색감과 감성을 불어넣은 픽토그램 작품들. 그 위엔 ‘현대’라는 시간적 개념이 투영돼 있다. 줄리안 오피의 전시를 보고 돌아가는 지하철 속, 무심코 지나쳤던 군중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단순화된 조형미와 경쾌한 직관성, 그 안에 숨은 현대인의 초상, 바로 ‘나’의 얼굴을 발견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얼굴조각 Lily. 매끄러운 굴곡과 명암 표현이 눈길을 끈다. / 김은솔 기자 eunsol_kim@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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