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재(수학11)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올 여름 사상 최악의 전력난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여름과 같은 무더위가 예년보다 일찍 찾아와 전국이 연일 비상입니다. 이에 정부를 비롯해 기업 및 관공서부터 일반 가정에서까지 너도나도 절전에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단조로운 톤으로 아나운서가 전하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것을 나는 볼펜을 굴리면서 듣고 있었다. 뉴스는 전력난이 원전 사고 덕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쏙 빼 먹고, 전력난이 예상되기 때문에 정부 대신에 가정과 학교에서 절약에 힘쓰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아니, “절전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는 말로 마치 스스로 그들이 무더위를 참아가며 전기를 아끼고 있다는 식으로 사실을 호도했다. 나는 28도 정도 되는 더위 속에서 볼펜을 가열차게 굴리며 풀리지 않는 문제에 골몰했다. 하늘은 높은 듯 하면서 낮고, 푸른 하늘 아래 매미가 찌르르르 우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6월 중순이었다. 

“소식 들었냐? 이번 기말은 시험 말고 레포트로 대신한다는군. 최소 분량이 열 장 이상이라는데.”

뒤에서 나의 어깨를 잡으면서 말을 걸어오는 것은 나의 (아마도) 절친한 친구 무라자키다. 무라자키는 나와는 전공이 다른 비교적 성실한 학생으로, 가끔 나의 과제를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는 식으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무라자키는 일본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이었지만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했다. 나는 무라자키의 재능 중에 언어를 습득하는 재능도 있음을 알고 놀라워했지만, 무라자키는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한국에 삼 년 정도 산 적이 있거든. 아버지 때문에.”

라고 답해 나의 얼굴을 묘하게 찡그리게 했다. 결코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고, 보통 그런 것을 ‘재능’이라고 하지 않냐라고 무라자키에게 응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남들과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쓸모 있는 재능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 무라자키는 이번 학기에 나와 같은 교양 수업을 듣게 되었다. 벌써 3학년인 그가 왜 교양을 듣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기졸업을 하기 전에 무난하고 노멀한 수업을 하나 듣고자 했다고 나는 멋대로 생각했다. 무라자키는 어깨를 잡은 손을 놓고 책상을 빙 돌아 나의 앞에 턱 하고 앉았다. 올려 입은 칼라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누구 만나기라도 하나? 칼라를 올리고.”

“아니, 아니. 이건 그냥 내리기 귀찮아서 그렇다고나 할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렇지. 사실 점심 먹기 전까지 실험 때문에 바빴거든.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지만.”

“아마 네 팀원들에겐 큰 도움이 되었겠지. 칼라를 내리는 것도 잊어먹고 실험에 열중한 정도면.”

“오늘따라 나를 괴롭히는군, 정수. 나는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이 년이나 같이 다닌 너라면 잘 알 텐데.”

나는 팔짱을 끼고 무라자키가 손을 꼼지락대면서 변명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라자키는 말보다는 손이 솔직한 사람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입으로 말하지 못한 것을 손으로 대신 말하는 타입이었다. 그것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무라자키에게 있어 ‘절친한 친구’였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기말 레포트라... 적당히 그림과 텍스트를 섞으면 열 장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무라자키, 교양 정도는 너무 성실하게 응수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학생의 실력을 보고자 내는 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이 수업이 재밌었는걸. 정수, 너는 어땠어?”

“글쎄... 나라면 말이지, 이 수업을 한 마디로 평하자면 “무난하다.” 교수도 평범하고, 듣는 학생들 중에도 튀어 보이는 녀석이 없고 (무라자키 너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수업 자체도 ‘큰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물리학과 중에선 너만 들을 텐데?”

“그 말대로야. 학생 명부를 뒤져봤지만, 물리학과는 나밖에 없더군. 다들 전공 수업을 듣느라 바쁜가봐. 자연과학부 신입생 중에는 듣는 사람이 몇 있던데 말야.”

“그나저나 무라자키, 올 여름은 어떻게 보낼 생각인가? 너라면 평범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어때라고 물어봐도. 그저 착실히 개인적인 일에 집중하고 있지. 아참, 뉴스 들었어? 올 여름 전력난 때문에 사회 전체가 절전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던데?”

“그거야 ‘발 벗고 나선’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정부 시책에 따른 것에 가깝지. 그래도 대학은 그런 규제에 자유로워서 좋잖아. 지금도 쾌적한 환경 아래 공부에 집중할 수 있고.”

“음... 그럼 학교를 나와서는? 시원한 곳이 어디 있지?”

“글쎄, 카페 정도일까.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뭔데?”

“그게 말이지, 재밌는 계획이 하나 있거든.”

무라자키의 눈빛이 한순간 달라지는 것을 나는 눈치챘다. 이것은 즉 무라자키의 머릿속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동 준비를 마치고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무라자키의 페이스에 응수해 주려고, 팔짱을 푼 다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수, 듣고 놀라지 마. 이번 여름에는 전기세 걱정 없이 시원하게 보낼 수 있어. 네가 나의 계획에 약간만 협조해 준다면 말야. 잠깐, 이게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겠지?”

“음. 언제나 범상치 않은 아이디어를 내 놓는 너라면 충분히 할 법한 소리로 생각한다만.”

“하하, 이런 쪽에서 신뢰를 얻는군. 좋아, 그럼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

중간에 손을 몇 번이나 휘저어 가며, 끝에 다다라서는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어서 흥분하고 만 무라자키가 한 이야기는 충분히 나의 흥미를 끌 만한 소재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라자키의 계획은 산업용 전기로 소비되는 전기를 끌어와서 개인용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이고도 기술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무라자키는 연구를 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아주 싼 값에 말이다. 나는 무라자키라면 그래도 허풍쟁이는 아니니까 하고 가벼운 판단을 내린 다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했다.

“그래, 분명 좋은 계획이야. 그런데, 들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정수, 네가 그 질문을 할 줄 알았어. 너는 언제나 ‘만에 하나’란 걸 생각하니까. 이건 확률의 문제야.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면, 99%에 표준편차 0.5%의 확률로 들키지 않는다는 걸 보장하지. 발전소에서 인식되는 건 어디까지나 ‘산업용 전기’니까, 전기를 끌어다 쓰는 쪽에서 직접 미세한 차이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들킬 염려는 없어. 그러니까 정수,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무라자키는 확신을 담아서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무라자키의 재밌는 장난에 손을 담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최종 판단을 내리고는, ok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좋았어. 그럼 구체적인 설명은 기말 레포트가 끝난 다음에 해 줄 테니까, 주말은 비워둬.”

“잠깐, 무라자키. 늦었지만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내가 살게.”

“아, 마음은 고맙지만 예정이 있어서. 다음에 사 주는 걸로 해!”

무라자키는 활기찬 목소리로 색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무라자키의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학생이 대부분 떠나 조용한 강의실에서, 무라자키의 “정수” 하는 목소리만이 귓가에 선명히 남아서 울리는 듯했다. 

무라자키가 나를 다시 부른 것은 기말이 지난 주말이었다. 연락을 받고 학교에 가까운, 냉방이 아주 잘 되는 카페를 찾아간 나는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시원한 차림의 무라자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흰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약간 간격을 띠고 그려진,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는 티셔츠였다. 무라자키는 나를 보더니 손을 들어 “여-” 하고 길게 끄는 듯한 인사를 했다. 저것만은 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온 몇 안 되는 습관 중 하나였다.

“반갑네, 무라자키. 거의 3주 만인가?”

“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지지난주 화요일이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나는 벌써 주문했거든.”

“그럼 나는 그냥 아메리카노로. 얼음 넣어서.”

“오케이.”

그러고서 무라자키는 직원을 불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킨 다음에, 자기가 먹고 싶었는지 치즈 케이크를 하나 추가하고는 나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돈은 내가 낼 테니까.”

“아, 그거라면야 잘 부탁한다. 네가 부탁한 자료 말인데, 찾아봐도 잘 안 나오더라고.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해 왔는데, 한번 살펴봐.”

나는 집에서 조사해 온 자료를 무라자키에게 건네주었다. 무라자키는 안경을 고쳐 쓰고 자료를 빠르고 세심하게 살펴본 뒤에, 탁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정수.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꽤 있거든.”

하면서 무라자키가 백팩에서 꺼내 내 놓은 것은 어림잡아 A4 200장 정도 되는 두꺼운 종이뭉치였다. 나는 우선 종이뭉치의 두께에 놀랐고, 그 다음 그 정도의 자료를 꺼내면서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무라자키의 태연한 표정을 보고 놀랐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 보통 신경을 쓴 게 아니구나.’

“어때? 이 정도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거라고 볼 수 있겠지? 전기를 끌어오는 테크닉이야 조작하면 되는 간단한 거고, 나머지는 우리가 쓴 전기를 ‘산업용’으로 탈바꿈하는 복잡한 위장 전술이지. 내가 어떤 식으로 했는지 설명해 줄까?”

“...아니, 됐어. 어차피 설명해 준다고 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고, 기술적인 부분은 전부 네게 위임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시작인데?”

나의 말에 무라자키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활짝 웃으며 답해주었다.

“바로 내일. 내일부터야.”

무라자키의 활기찬 말과 함께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치즈 케이크가 나왔고, 무라자키는 케이크를 맛있게 씹으면서 계획의 세부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것을 나는 감흥 없는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면서 듣고 있었다.

 

‘우선, 목표로 하는 타겟은 학교에 가까운 제철소야.’

무라자키가 타겟, 즉 우리의 희생양으로 삼은 곳은 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철소였다. 이 제철소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에서 제일 수준에 드는 거대한 규모의 제철소로, 24시간 내내 돌아가며 상주하는 직원만 해도 몇천 명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다. 산업화 시기에 생겨난 기업이 으레 그렇듯 이 제철소 역시 시시한 ‘신화’라고 할 것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역으로 외부에는 정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너도 쇳물을 녹이는 데는 굉장한 열이 필요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 그래, 제철소는 연탄이나 석유를 이용하는 고로도 쓰지만 전기를 이용하는 전기로도 같이 사용하지. 용광로를 섭씨 1600도 정도로 가열하려면 얼마나 많은 전기가 드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야. 즉 우리가 여기에 아주 조금의 사용량을 추가한다고 해도 들킬 염려는 전혀 없지. 생각해 봐. 개인이 전기를 쓴다고 해도 얼마나 쓰겠어? 고작해야 산업용 전기의 1/1000~1/100000 정도지. 데이터에는 드러날지 몰라도, 누가 그 미세한 차이를 분간해 낼까?’

무라자키의 말은 언제나 설득력 있었다. 그래서 그를 처음 만난 사람은 곧잘 무라자키의 설득에 동화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무라자키의 치밀한 계획의 유일한 헛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무라자키의 발목을 잡을 치명적 약점이 되기도 한다.

‘정수, 네가 도울 것은 딱 하나야. 너는 네 집에 내가 직접 만든 어댑터를 설치하기만 하면 돼. 어댑터의 역할은 간단해. 바로 네 집으로 흘러드는 전기를 ‘산업용 전기’로 인식하게 만드는 거지. 한번 인식하고 나면, 그 뒤로는 아마도 영원히 전기를 공짜로 쓸 수 있을 거야. 네가 이사라도 가지 않는 이상.’

무라자키는 참으로 그럴 듯한 문장으로 말을 맺었다. 실은 나는 무라자키의 말을 들으면서 아메리카노가 너무 쓰다거나, 시럽을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무라자키가 나를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3초 늦게 자각한 뒤에 뜻 모를 웃음을 살짝 웃어 보였다. 무라자키는 나의 웃음에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부디 그 안심이 너를 잡아먹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만.

여하간 나는 사흘 뒤에 무라자키에게서 갓 땐 납땜 냄새가 풍기는 어댑터를 받아 변압기에 설치를 마쳤다. 설치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만, 집에 같이 사는 학생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집에 사람이 없는 때를 골라야 했다. 그 뒤로는 일부러 두꺼비집을 열어볼 학생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방에 달린 싸구려 에어컨을 켤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방에 있던, 매트리스가 너무 낡아 새 것으로 교체한 침대에 누워서, 찬 바람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것일까? 무라자키의 바람도, 무한정 쓸 수 있는 전기의 샘도, 축복과도 같은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도, 그리고 나의 여름방학도.’

아니, 여름방학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라자키의 꼬임에 반쯤 넘어간 나머지, 정작 여름방학에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 두지 못했다. 아직 개학까지는 약 두 달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갑자기 등짝을 채찍에라도 맞은 것처럼 퍼뜩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라자키, 그래, 무라자키가 해답이다.

“딩동- 딩동-”

무라자키가 사는 ‘외국인’을 위한 기숙사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다들 낮이라 어딘가로 놀러 나간 모양인지, 열려 있는 창문에서도, 굳게 닫힌 방문에서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전혀 그럴 필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혹시 무라자키도 ‘바닷빛 여름방학’을 즐기러 밖으로 나가버리고 만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등등의 생각으로 나의 머리가 보이콧을 외치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어째선지 퀭한 모습의 무라자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좋은 아침... 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군. 그런데 무슨 일로?”

“한번 알아맞춰 봐, 무라자키.”

“갑작스럽게 퀴즈를 낸다고 해도 응수해 줄 기분이 아니야. 사실 오늘 날을 샜거든.”

“그래? 어쩐 일로? 방학이잖아?”

“그렇지, 방학이지. 하지만... 여하튼 너를 여기에 들이기에는 ‘돌아가고’ 있는 게 너무 많아. 다음에 쇼핑몰에서 보는 게 어떨까? 한 주 뒤라면 시간이 생겨.”

나는 피곤해 보이는 무라자키를 향해 여러 가지 심난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무라자키는 문 앞에 서서 단 한 마디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을 듯한 눈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무라자키에게 잘 쉬라고 덕담을 건넨 뒤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무라자키의 말만 믿고 에어컨을 켜 두었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은 남극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시원했다. 하지만 내가 남극에 직접 가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에어컨이 쌩쌩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 동시에 지구온난화에 아주 적은 기여를 하고 있는 나만의 섬에서 열심히 방학 계획을 짜 보았지만, 마땅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래서야 무라자키에게 어댑터를 얻은 보람이 없잖은가! 하고 자책해 보았지만, 아니, 그건 무라자키가 자발적으로 준 거잖아 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본가로 돌아가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행을 떠나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데가 한 군데 있었다.

‘제철소로 가 보면 어떨까.’

제철소로 발걸음을 옮긴 날은 낮 최고기온 섭씨 33도를 기록할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이래서야 무더운 제철소로 온 의미가 전혀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일단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로 했다. 예상대로 건물 안은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고 있어 시원했고, 저 앞에는 직원 한 명이 앉아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철소 견학을 예약한 학생인데요.”

“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정수라고 합니다.”

“이정수, ... 아, 오늘 견학이네요. 잠시만요.”

직원은 말을 마친 다음에 이름표를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소속 대학과 이름을 두꺼운 종이에 적어 투명한 필름에 손수 넣어 주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원체 소심한 나는 그저 이름표를 받아드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학생과 같이 견학할 중학생들이 몇 명 더 올 테니까, 저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직원이 가리키는 가죽소파에 앉아 이름표를 만지작거리거나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저 직원은 내가 이 제철소의 이름으로 전기를 마구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알까. 아니, 알 리가 없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하하, 나는 네놈들의 전기를 뺏어 쓰고 있다고! 어디 한번 밝혀내 보시지!

한 20분 정도 기다리고 있자니 자동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학생이 넷 보였다. 다들 남국의 뜨거운 열기에 살이 타 옅은 갈색의 모습이었다. 특히나 건물의 하얀 벽면과 대비되어 더욱 어둡게 보였다, 차갑게 식은 갈색왜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중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예약하고 온 모양인 듯, 나와 똑같은 이름표를 받아서 목에 건 다음에 안내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중학생들은 혼자서 이곳에 찾아온 내가 어색한 모양인지 눈치를 살피면서 저들끼리만 떠들어댔다. 뭐, 마음껏 떠들어 대라구. 나중에 제철소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서 옆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잠시 뒤에 평범한 사무직 직원으로 보이는 가이드가 등장했고, 우리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제철소를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이곳이 바로 고철을 분류하는 곳입니다. 고철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기 때문에, 각 쓰임에 맞는 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기계들이 알맞은 곳에 고철을 분류하는 일을 합니다. 자, 이쪽으로 건너오세요.”

중학생들은 나를 앞질러 펄쩍 뛰어서 빠르게 걷는 가이드를 따라간다. 나는 도대체 왜 아까운 방학을 쪼개 이런 데까지 와야 했는지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후회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지만.

“여기서는 분류한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입니다. 저기 뻘겋게 녹은 쇳물이 보이죠? 사람이 저곳에 들어가면 흔적도 안 남고 녹아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조심에 조심을 다합니다. 여러분도 저기서 일하고 싶지는 않죠?”

어이,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마지막 말은 안 해도 좋을 사족이다. 나는 사무직 직원의 비열함에 혀를 찼다. 누구라고 저기서 굳이 일하고 싶어서 일하는 줄 아나. 무시하고 금방이라도 입을 벌릴 것 같은 뜨거운 쇳물이 녹아 있는 용광로를 바라본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터미네이터 2에서 터미네이터가 스스로 용광로에 뛰어내리면서 “I’ll be back”이라고 말한 장면을 되새겨 본다. 합금로봇이 용광로에 떨어지면 순도가 얼마나 떨어질까 계산해 본다. 저 멀리서 중학생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용광로는 뜨겁기만 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식힌 철을 제련합니다. 철을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탄소를 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탄소 함량이 높으면 철이 휘어져버리기 때문에, 산소를 불어서 탄소를 산화시키는 공정을 거칩니다. 마지막으로 모양틀에 넣어 굳히면 우리가 자주 보는 단단한 철이 됩니다. 어때요, 대단하죠?”

아뇨, 전혀 대단하지 않습니다. 나와는 반대로 중학생들은 철 만들기에 아주 푹 빠진 모습이다. 혹시 철 오타쿠라도 되나? 아니, 설마 그런 건 없겠지. 철도 오타쿠도 아니고. 가이드는 이제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중학생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아무래도 좋을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 나는 중간에 나가버릴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은 일방통행이다. 철이 움직이는 것처럼.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제철소 견학이 끝났다. 나는 <쇼생크 탈출>에 나온 주인공이 십몇 년간 숟가락으로 판 굴로 탈출에 성공한 뒤에 한 것처럼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쳤다. 다행히도 나의 이런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아직도 태양이 내리쬐는 밖은 여전히 더웠다. 카페에라도 가서 늘어질 요량으로, 나는 중심가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그 뒤로 무라자키하고 만난 것은 그의 퀭한 모습을 본 뒤로부터 일주일 후가 아니라 삼 주가 지나서였다. 무라자키는 삼 주가 지나도록 연락 한번 없었다. 내가 전화를 걸어도 무라자키는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다 받는 일이 있어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금방 끊기 일쑤였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뭔가를 꾸미느라 바빴겠지, 당시의 나는 그 정도로 생각했다.

다시 무라자키와 만났을 때, 나는 약간 밝음을 되찾은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반가움을 느꼈다. 무라자키도 나와 마찬가지로 느낀 듯했다. 우리는 팔을 들어 손바닥을 한번 마주친 뒤에,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잘 지냈냐?”

“당연하지. 그러는 너는?”

“나도 이런저런 일로 바빴지만... 잘 지냈다고 볼 수 있지.”

“볼 수 있지가 뭐냐 볼 수 있지가. 삶에 추측은 없다고, 친구.”

무라자키는 나의 말에 웃음지었다. 이제 방학도 한 달 조금 더 남았다. 나는 요번 방학이 무라자키에게 있어서 마지막 방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그 부분에 대해 무라자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무라자키는 아직 두 학기가 더 남았다고 대답하고서,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여름방학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네 말대로.”

무슨 소리지? 과거의 나는 무라자키를 향해 한껏 의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과거의 무라자키는, 내가 기억하는 무라자키는, 그 무언의 압박에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방학도 이제 삼 주밖에 안 남은, 여전히 덥디더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무라자키는 이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스토커라도 된 것 같아서 이제 전화는 자제하기로 했다. 차라리 다른 데 골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나는, 학교에 출석해서 소속되어 있는 유일한 동아리인 퀴즈 동아리에 참석하거나 학교에서 열리는 소규모 공연을 보거나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재밌는 소설을 찾아 읽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오락실에라도 가서 잘 하지도 못하는 게임을 하거나 뭐 그런, 충실하다면 충실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지 못한 방학을 보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충실한 방학을 보낼 이유가 뭔가.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여름방학에 맞선 나에게, 여름방학은 하염없이 시간을 깎으면서 굴복해 갔다. 그렇게 이번 여름방학도 다른 여느 방학과 마찬가지로 흘러가나 했다.

 

“이정수 학생 맞죠? 경찰입니다.”

내가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방학이 한 주밖에 안 남은, 더위도 한풀 꺾여가는 날이었다. 경찰은 간단하게 자신의 소속을 밝힌 다음에, 혹시 무라자키라는 친구를 잘 알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잘 안다고, 너무나 잘 알아서 연락도 안 된다고 답할 도리밖에 없었다. 경찰은 혹시 무라자키가 막대한 양의 전기를 끌어다 쓴 사실을 아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경찰은 이제 정말로 모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당장 경찰에 신고했을 거라고 답했다. 거짓말이었지만, 마지막 대답에 경찰은 만족했는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당장 무라자키에게로 달려가야 했다.

 

“무라자키! 무라자키! 안에 있어? 당장 문 열어봐!”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밖에서는 매미가 녹음이 떠나가라 우짖고 있었다. 한여름 낮은 아찔할 정도로 팽글거렸다. 나는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밑으로 내려가 경비실에 열쇠를 부탁했다. 경비원은 나의 다급한 설명에 알았다는 듯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스터 키를 들고 무라자키가 사는 5층으로 향했다. 경비원이 열쇠로 문을 따는 모습을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경비원을 밀치고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안에는 팬이 돌아가는 낮은 소리가 들릴 뿐 다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무라자키의 방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나는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라자키는, 아마도 나의 절친한 친구 무라자키는 자신의 방에서부터, 넓게 말하자면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나는 과거로 향하는 기억 테이프를 재생했다. 무라자키는 “이번 여름방학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하고 말했다. 그게 이 뜻이었나. 무라자키의 방에는 그가 쓰던 침대와, 책장과, 옷장과 컴퓨터와 노트와 슬리퍼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물체가 하나 있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로부터 이어진 콘센트는 까맣게 타서 마치 검댕이 벽에 달라붙은 듯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에는 더듬이처럼 보이는 손잡이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 뒤돌아보니 내가 밀치고 들어온 경비원이었다. 경비원은 무라자키의 방을 한번 휘 돌아보더니, “어둡구만.” 하고 한 마디 했다. 그러고서 커튼을 걷어 햇빛이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 한 장이 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집어올렸다. 거기에는 무라자키의 필체로, 다만 이렇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이번 여름방학은 즐거웠다. 지구에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무라자키”

“망할 녀석!” 하고 크게 외치고 책상을 세게 쳤다.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선반 위에 올려둔 디지털 시계가 떨어졌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얇은 모니터도 파르르 하고 떨었다. 경비원은 잇달아 들려오는 큰 소리에 놀랐던지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는 “학생, 괜찮아?” 하고 물어보았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이 사라져 버렸는데...”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막으면서 나는 대답했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세계의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나의 이성이 돌아왔다. 차분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전화를 받았다. 경찰이었다.

“무라자키는 사라졌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모든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무라자키의 주소는 알고 있죠? 당장 여기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잠깐, 학생? 지금 무라자키의 방인가? 학생!”

 



 

그렇게 나의 여름방학은 종언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