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종윤 기자 (burrowkr@skkuw.com)

▲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 / ⓒ뉴스메이커
 
봄을 알리는 3월의 시작에는 언제나 태극기가 함께한다. 삼일절을 기리기 위함이다. 삼일절, 그날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봄을 되찾기 위한 선조들의 함성이 전국에 울려 퍼진 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작 18세에 불과했던 여고생 유관순이 있었다. 당시 시대를 참작했을 때, 어린 나이에 그것도 여자로서 앞장서 목숨을 내놓은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가 오늘날 김구, 안중근, 윤봉길 등과 함께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또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이자 독립운동가의 대모 곽낙원 여사 △여성 광복군 1호 신정숙 △윤희순 여성 의병대장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 여사 △14세 여성독립군 오희옥. 모두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성독립운동가다. 본지에서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독립운동의 역사적 과정과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그려냈다. 더불어 지난 1일 출범한 ‘여성독립운동 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을 만나 여성독립운동의 의의를 들어봤다.

 ‘여권통문’,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는 서양 근대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은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윽고 서구 문물의 영향을 받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가부장제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리고 1898년 9월, 마침내 여성단체 ‘찬양회’가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권리선언서인 ‘여권통문’을 발표했다. 여권통문은 여성들의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성독립운동을 연구한 윤정란 서강대 교수는 “여권통문을 근대 여성운동의 시초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서양 열강의 잇따른 침략으로 성차별에 민족차별까지 받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에 국내 여성운동은 민족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무너지면서 여성운동은 구국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
 

여학생들, 만세운동에 이바지하다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 구국운동의 한 흐름으로 전국에 수많은 사립 여학교가 생겼다.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모임을 통해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공유했다. 그 결과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여학교 내에서는 항일의식을 지닌 수많은 비밀결사단체가 조직될 수 있었다. 1913년 교사 황애덕의 주도하에 결성된 평양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가 대표적인 예다. 송죽결사대원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지부를 만들어 점조직 형태로 활동했다. 황애덕은 도쿄로 유학 가 3·1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2.8독립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결사대원들의 활동은 1919년 3·1운동 당시에 많은 여성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 윤 교수는 “3·1운동은 여성독립운동의 기폭제”라며 “3·1운동을 기점으로 많은 여성 항일단체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3·1운동 이후 생긴 상해임시정부는 이러한 여성들의 주도적인 활동을 인정해 헌장에 여성의 참정권과 선거권 등을 명시했다.

▲ 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 기념사진. / ⓒ네이버캐스트

여군들, 전투의 최전선에 나서다
1930년대 들어서 일본과 중국이 잦은 전쟁을 벌이며 이전보다 한국 땅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숫자가 많아졌다. 일본의 군사력이 늘어나면서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도 훨씬 심해졌다. 이에 더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대부분 항일단체가 해외로 이동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중경 등지에서 벌어진 군사 활동이 주를 이뤘다.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속 부대인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이 창설됐다. 광복군에는 여성들도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로써 최초의 여성군인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1940년대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도 한몫했다. 개화기부터 지속한 여성운동으로 여성의 지위가 이전보다 향상됐지만, 여전히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며 독립군 내 남녀 간의 역할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19년 맹산독립단을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조신성과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시도하다 만주로 망명한 남자현은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은 용기와 전투력을 갖고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의 『한국여성독립운동』에 따르면 당시 광복군은 총 4개의 군사지대로 구성됐는데, 전쟁 말기에는 지대별로 여성대원이 30명씩은 존재했다. 여성 광복군은 남성과 같은 수준의 군사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광복군 모집 활동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을 수행했다. 일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여성대원도 많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광복군 출신 오희옥 여사는 “중국 학생으로 위장해 일본군이 점령한 국내 지역으로 들어가 선전활동을 벌이기도 했다”며 당시의 경험을 전했다.
그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빼앗긴 들에 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처절한 상황에서도 그녀들은 늘 독립에 대한 간절함을 잊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가 그녀들을 기억할 때다.

▲ 오희옥 여사가 독립투쟁 당시 경험을 말하고 있다. / 한영준 기자 han0young@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