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나영인 기자 (nanana26@skkuw.com)

최근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 중 최종 파트너 선택을 앞두고 출연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해당 출연자는 ‘힘들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라는 유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프로그램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면서 제작진을 향한 비판이 일었다. 이어 일반인들이 짝을 찾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 구성 자체가 위험하다는 비난이 거세짐에 따라, 결국 프로그램이 폐지됐다.
이번 사태를 두고 한 평론가는 “이전엔 △△녀라며 출연자들을 아이템화 시킬 때는 언제고, 사건이 터지니 이제야 프로그램을 비판한다”며 뒤늦게 프로그램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제작진들에게 비난을 쏟는 언론과 대중을 비판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은 방영 뒤 매주 수백 개의 기사가 올라올 정도로 언론의 많은 관심과 시청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3년간 방영됐다.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많은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가상으로 설정된 애정촌에서 미혼 남녀가 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리얼하게 나온다. 애정촌은 실제 결혼시장의 축소판으로, 사랑을 찾기 위한 로맨틱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다. 내 인생의 동반자를 찾는 일은 더 이상 사적이고 감성적인 일이 아닌, 하나의 경쟁이다. 그 속에서 출연자들은 이름 대신 1호, 2호라는 번호로 불린다. 자신의 존재는 오직 졸업한 학교, 현재 가진 직장 등으로 평가될 뿐이다. 이 서바이벌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쇼윈도의 걸린 마네킹처럼 자신을 전시해야만 한다. 원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기 위해 게임을 하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 선택받지 못해 혼자 남겨지고, 인기가 없어 소외된 사람들은 좌절한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연애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한 출연자가 소외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TV 속 출연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 현대의 거의 모든 사회는 서바이벌의 현장이다. 대학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 이상 학생들은 학문을 하고 진리를 탐색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빌어먹을 취업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다. 그 가운데 대학생들은 각각의 개성을 가진 주체가 아닌 경쟁 시장에 내던져진 취업준비생일 뿐이다. 그들은 학교의 명성과 대외 활동, 자격증, 학점으로 평가받는다. 취업준비생 1호, 2호, 3호 … 그곳에는 살아남은 자와 실패한 자만이 있다.
이런 경쟁시장에서 우리는 살아남는 것 이상의 다른 활동을 하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수치심과 압박감을 주는 사회에 문제 제기하지도, 내 의견을 말하지도 않는다.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굳이 말하지 않는다. 비판하고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서다. 이런 열패감과 좌절감에 빠지면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발언할 수 있는 영역을 스스로 줄여 버린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과 관련한 다른 얘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내 얘기는 취업과 연애로 국한되고, 내가 속한 공동체도 내 동아리, 내 동기들에서 그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학내 자치 문제는 당장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으니 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두가 좌절하는 와중에 경쟁 안에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해보고, 내 주변의 이야기도 하고, 이 사회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그들이 살아남는 문제에 관심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대학생 1호, 2호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남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서바이벌의 참여자로서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경쟁하게 만드는 주변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면서 나 자신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지난 월요일에 열린 ‘지속가능한 등교를 위한 월요 디너-쑈’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다만 어떻게 살아남는가의 문제다. 잠시 멈추고 나에게 질문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