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상(프문13)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문화와 정서에서 힐링을 권고한다. 며칠 전 모임에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일에 비하면 넌 새 발의 피야” 하며 점차 목소리를 높여 불행의 추억을 만담하는 자리가 됐다. 이렇게 말만 해도 힐링이라며. 대화가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갈 때에는 힐링이 아니라 킬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정말 힐링을 주고받은 것일까?
아주 조금의 외로움과 아주 약간의 우울은 힐링의 귀한 재료로 삼을 수도 있을 법한데, 우리는 그것을 힐링을 통한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한 우리는 여전히 외롭고 우울할지 모른다. 외로움과 우울의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우울의 언어를 모르고선 기쁨의 문장을 읽지 못한다. 제 스스로 기쁨을 갖지 못한 채, 타인의 경험과 타인의 삶이 가득한 공간에서 안심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힐링의 매뉴얼만 정독한다.
외로움과 우울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흔들림 없이 피는 꽃 없다’는 말과 ‘갈대와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옷을 입은 채 바닷물에 빠지는 것도 인생이다.
어쩌면 우리는 두 가지 오해 속에서 점점 외롭고 우울해지는 것 아닐까? 할 일 없이 심심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닌, 무언가 하고 있는 게 맞다는 오해. 또 기쁨과 행복만 존재하는 것이 완벽한 마음이라는 오해.
외로움과 우울의 언어는 ‘침묵’이다.
나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한 침묵의 언어.
 

 

 

 

 

▲채희상(프문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