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윤 기자 (kimi3811@skkuw.com)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입안에 맴돌던 무수한 이야기가 어디로 숨어 버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패션 기획이 그랬다. ‘패션’은 필자가 신문사에 들어왔을 때부터 다루고 싶었던 주제였다. 수습 딱지를 갓 떼고 정식 기자로 참여한 첫 기획회의. ‘패스트패션과 슬로우패션’이라는 주제로 자신 있게 2p 기획을 가져갔다. 겁 없는 준정기자의 기획안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당했다. 거절은 날카롭지 않아 더 슬펐다. ‘나도 네가 좋은데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당돌한 고백의 결과였다. 그는 재구체화를 하면 생각해보겠다는 고단수의 여지를 남겼지만, 부끄럼에 다시 입을 뗄 수 없었다. 커져 버린 마음은 동경으로 남기기로 결론지었다. 외면한 채 필자는 6개월간 꽤나 다양한 이들과의 외도를 즐겼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문득문득 솟아나는 공허함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기 전에, 새벽 두 시쯤 말이다.
그러다 우연찮게 특집팀에 참여하게 됐고, 드디어 필자가 끊임없이 탐했던 그, ‘빈티지패션’과 재회했다. 힘들다는 투정 속엔 ‘이번엔 잡고야 말겠다’는, 어깨 뽕만큼이나 솟아오르는 욕망이 있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5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순히 용돈을 벌기 위해 친구들과 참여했던 플리마켓. 안 입는 옷을 깨끗이 세탁하고 수선해 새 주인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장은 필자를 홀리기 충분했다. 세상 하나뿐인 옷이 시공간을 초월해 돌고 도는 일. 사고 판 옷들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랑을 하자면, 필자의 ‘그’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려 깊은 성격에, 고만고만한 복제품 사이 멀리서도 톡 튀는 특별함을 지녔다. 옷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최 여사의 처녀 시절 롱치마를 주저치 않고 입는 것을 보니, 콩깍지가 제대로 씌긴 했나 보다. 빈티지패션 체험 기사를 위해 빈티지의 메카인 광장시장과 명동 ‘에이랜드’를 방문했다. 취재를 가장한 황홀하고 유쾌한 데이트였다.
연애를 하면 미처 몰랐던 자신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던가. 다섯 스푼의 자유분방함, 두 스푼의 여성스러움은 필자가 빈티지를 사랑하며 발견하게 된 새로운 모습이다. 잠들기 직전 그가 들려주는 달콤한 옛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와 함께 시간을 쪼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풀어진 실밥, 누런 얼룩, 은근하게 밴 땀 냄새가 형용하는 노스탤지어는 알고도 모른척하는 귀여운 애교다.
옷장 속 은밀히 숨죽이던 필자의 사랑에 산소 호흡기를 선사한 특집팀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