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나영인 기자 (nanana26@skkuw.com)

“너 좀 편협한 거 같아.”
“너무 공격적이야.”
“왜 그렇게 삐딱하게만 생각하니?”

필자가 가끔 듣는 말이다.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전달하는 일을 할 때 자주 듣는다. 사람들은 내게 주류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 대학에 들어오기 전 나는 주류의 입장에서 늘 생각하고 있었다. ‘비주류의 시각에서도 바라보자’는 말이 정말 편협한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그것을 편협하다고 느낄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기득권의 입장에서 재구성됐다. 이미 주류와 기득권의 입장은 널리 퍼져있고,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체득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는 것은 어느 것이 더 옳아서가 아니라 한쪽이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하나의 관점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게 비주류의 시각은 ‘옳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면서 끊임없이 사회에서 소외된다.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이야기할 때 “너 주류의 입장은 왜 생각하고 있지 않니”라고 묻는 것은 마치 대기업 청소 노동자에게 회장님의 안위와 입장을 고려해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성폭행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미래도 있는데, 처벌을 하려 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니. 너만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편협하다’는 말을 사회적 약자에게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불합리한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낼 기회조차 없다가, 이런 얘기도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인정해달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편협한 것인가? 그 말의 바탕에는 ‘너의 말은 의미 없고,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편협하다는 말은 주류가 비주류의 입을 막을 때 사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비주류의 목소리를 불편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닌 주류의 입장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책임을 묻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일까. 그러나 비주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적 약자의 시각이 모두 맞으니, 주류의 시각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시각만이 존재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주류의 것보다 의미 없는 것, 옳지 못한 것으로 취급하지 말고, 동등한 입장에서 사유해보자는 것이다. 청소노동자가, 성소수자가, 여성주의자들이 세상을 뒤엎고 그들의 세계를 만들자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나의 시각도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학보사가 학생, 교수, 교직원 등 모두를 위한 신문이지만, 학생에게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러하다. 학생은 대학 내에서 대학 운영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제일 적고, 이에 대한 정보도 제일 부족하다. 학교 운영진들의 목표 아래 학생들의 자치권이나 목소리는 묵살되기 쉽다. “학생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일류 대학으로 나아가는 갈림길에 섰는데 그런 얘기들이 중요합니까? 학교의 입장을 생각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학교 운영진 중심적 생각이다. 학생 자치가 일류대학이 되는 과정에 방해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 덜 의미 있는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환경미화라는 목적 아래 학생들의 목소리를 담는 게시판이 철거됐듯이 말이다.
필자는 학생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청소노동자, 성소수자, 여성주의 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더는 비주류의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고 사회에서 동등하게 논의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