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여성, 사회가 내몰고 국가가 관리했다
기지촌 여성, 사회가 내몰고 국가가 관리했다
  • 나영인 기자
  • 승인 2014.05.12 17:34
  • 호수 15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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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서는 ‘패스’라고도 불리는 성병 검진표. 이 검진표가 없으면 클럽에 입장할 수 없거나 불시 검문을 통해 끌려가기도 했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가난과 가부장적 사회가 기지촌으로 여성들 내몰아
1950년에 시작해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은 우리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남은 건 20만 명의 미망인, 10여만 명이 넘는 고아,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 전쟁으로 인한 공동체 파괴와 극심한 빈곤은 생계를 잇기 힘든 여성들을 기지촌으로 내몰았다. 당시 여성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공장에 들어가 여공이 되는 여성들은 일부 소수의 젊은 여성이었다.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대표는 “당시 사회의 극심한 가부장적 구조와 순결이데올로기가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기지촌으로 흘러간 여성들은 아버지와 남편에 의한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경우가 많으며, 생계를 잇기 위해 식모살이를 하던 가정에서 폭력에 시달린 경우도 많았다. 또한 여자가 순결을 잃는 것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여기던 당시, 성폭력의 피해로 삶을 포기하고 기지촌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거나 기지촌에서 포주에 의해 강제로 미군과 관계를 맺은 후 자포자기한 경우도 있었다.

기지촌으로의 유입과 생활
“이웃 언니 따라 간 다방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데리고 간 곳이 알고 보니 포주집인데, 그땐 그게 뭔지도 몰랐지.” 햇살사회복지센터의 증언집에 나온 강옥선(가명) 씨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여성은 취업 사기와 인신매매를 통해 기지촌으로 흘러들어 갔다. 기지촌이 어딘지도 모른 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간 경우가 많으며, 직업을 소개해 주겠다는 지인에 의해 포주집으로 팔아넘겨 졌다.
기지촌의 생활은 크게 포주집에 속해 영업하거나 개별적으로 영업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대개는 인신매매 및 취업 사기로 포주집에 속했다가 이후 개별 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주는 매매춘 여성을 두고 영업하는 업주로, 여성들에게 숙식을 제공함으로써 빚을 지게 만들었다. 또 여성들이 빚을 갚기 전까지 심한 구속을 하고, 어떤 경우 폭행을 일삼았다. 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여성들은 개별 영업을 하거나 미군과 함께 동거하는 경우로, 미군들이 빚을 대신 갚아주고 생활비를 대줬다. 당시 여성들은 비교적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미군과의 동거 혹은 결혼을 통한 미국으로의 이주를 꿈꿨다.

미군 철수 막기 위한 기지촌 여성에 대한 국가의 관리
미군 기지촌 여성들은 당시 우리나라 외화벌이의 주역이었다. 기지촌 주변 상권들은 모두 기지촌 유흥산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다. 미 8군의 한 정보장교는 1992년 인터뷰에서 기지촌에서 벌어들이는 외화가 1960년대 남한 GNP의 25%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기지촌 주변 유흥산업은 점점 더 번성했고, 이에 따라 성매매 산업 역시 커져갔다.
1960년대에 정부는 기지촌에 대해 방임주의 정책을 펼치며 기지촌 여성에 대한 별다른 관리와 통제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주둔하는 미군의 감축’을 발표했다. ‘닉슨독트린’으로 알려진 이 외교방침은 1970년 주한 미 대사 윌리엄 포터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한국에도 군 감축이 될 것을 알렸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도발이 두려웠던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군이 떠나는 것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했다. 이에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당시 정부는 1971년부터 ‘기지촌정화운동(이하 정화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기지촌 여성들을 통해 군대 내 인종차별 갈등을 해결하고, 미군의 안전한 성생활을 보장해주고자 했다. 정화운동을 통해 미군은 그동안 기지촌에서 벌어지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를 꾀했으며, 한국 정부는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정화운동은 닉슨 독트린 초기 악화됐던 주한 미군과 한국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줬으며, 둘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기지촌 여성의 자유 억압했던 기지촌정화운동
정화운동으로 △경찰 △군대 △내무국 △헌병 등까지 합세해 국가 차원의 관리가 이뤄졌다. 지방 정부에 의해 성병과 유흥업소인 클럽에서의 서비스 실천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은 1년에 두 번 이상 행해졌다. 교육에서는 ‘민간 외교관’, ‘외화벌이의 역군’으로서 기지촌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미군에게 안정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을 가르치며 성매매를 직·간접적으로 장려했다. 또한 클럽업주와 매춘 여성 등에게 미군에 대한 인종차별을 줄이는 데 협력하고 성병 검사를 엄격하게 실시했다. 이에 응하지 않을 시 미군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렸다.
기지촌 여성들은 지역 경찰과 보건소에 자신을 등록하고, 클럽 출입 때는 보건증을 지녀야 했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뿐 아니라 기지촌에 상주하는 여성이라면 모두 검진 대상이었다. 여성들은 1주일에 두 번씩이나 검사를 맡아야 했다. 헌병과 경찰은 길에서도 집에서도 수시로 단속을 나갔으며, 보건증이 없으면 강제로 끌고 가 검진을 받게 하고 감금했다. 김지연(가명) 씨는 증언집에서 당시 불시검문을 회상하며 “처녀도 아기 엄마도, 그냥 다 보건소로 싣고 갔다”고 전했다.
정화운동으로 기지촌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일상생활의 군사화가 심화됐다. 경찰과 헌병, 검문소와 불시 검문과 강제 감금이 늘어나면서 기지촌 여성의 자유는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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