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자의 기억 속 그 시절 이야기
숙자의 기억 속 그 시절 이야기
  • 나영인 기자
  • 승인 2014.05.12 17:37
  • 호수 15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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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촌 여성들은 임신을 할 경우 대부분 낙태를 했지만, 종종 아이를 낳아 기르기도 했다.그 중 일부는 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김숙자 씨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 다른 게 있는지도 모르고, 당시에는 지내면서도 힘들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고, 그렇게 살았지.”

# 힘들었던 어린 시절
김숙자 씨의 어머니는 자주 그녀에게 화풀이했다. 늘 맞고 구박당하던 그녀는 어렸을 적 줄곧 엄마가 계모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안의 돈을 들고 나가서는 다 말아먹고, 돈이 완전히 없어지면 그때만 일했다. 어느 날은 여자를 데리고 와 아이도 낳았다. 그녀가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그녀 밑으로 동생들이 생기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그 화를 모두 그녀에게 풀었다. 두 남동생이 태어나고도 어머니의 매질은 계속됐다. 견딜 수 없었다. 12살 때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 서너 명과 집을 떠나 무작정 기차를 탔다.
“어디 가니? 부모 형제는 있니? 갈 곳은 있니?”
“아뇨. 다 돌아가셨어요.”
같은 기차를 타고 가던 어른의 질문에 거짓말을 했다.
“그럼 우리 집에 가서 살래?”
그렇게 들어간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밥과 빨래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줄만 알았지 집안일은 해 본 적이 없던 그녀는 모든 게 서툴렀다. 밥도 태워 먹고,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혼났다. 주인집 아기가 울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돌봤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때 챙겨 먹지 못했다. 그래도 돈 한번 받은 기억이 없었다. 19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식모살이를 했다.

▲기지촌 여성은 클럽으로 일을 나갈 때 화려한 복장과 화장을 했다.ⓒ햇살사회복지회 제공

# 기지촌의 첫 기억
숙자는 19살 때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과 기지촌이 형성된 송탄에 갔다.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친구들은 업주 밑에 들어가 일을 했고, 금방 적응했다. 그녀는 일에는 어리숙해 친구들과 어울리기만 했다.
“넌 너무 어리다. 일에 방해되니까 그리로 가.”
업주 아줌마는 그곳에서 일하던 한 언니 집으로 그녀를 보냈다. 1년간 그 언니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이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다 지켜봤다.
그녀는 기지촌의 생활이 어떤 건지 언니가 생활하는 걸 보고 배웠다. 포주집에 들어가면 고생하고, 어떻게 지내야 편안한지 배웠다. 같이 살던 언니는 어느 날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또 혼자가 됐다.

# 정착하지 못했던 나날
숙자는 미군 기지가 있는 경기도 성환으로 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지촌에서 일했다. 밤이 되면 같이 일하는 여성들과 클럽으로 갔다. 한때 포주집에 들어갔지만 구속이 너무 심했다. 빚이 없으니 금방 정리할 수 있었고, 다시 먼 길을 떠나 다른 미군 기지촌이 있는 충청북도 진천으로 갔다. 미군은 100명 남짓, 조그만 곳이라 포주도 없이 여성들끼리만 생활했다.
“같이 가자.”

▲ 기지촌 여성 가운데는 미군과의 교제를 통해 동거를 하기도 했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그곳에서 친하게 지내던 미군이 전라북도 김제로 발령받았다. 그와 함께 김제로 가서 한동안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요정에 빠진 그와 자주 싸울 일이 생겼다. 화가 나 진천으로 간 적도 있었지만, 다시 돌아왔고 그가 미국에 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다시 진천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1년간 진천에서 지내다가 2년간 태안에서도 지냈고, 그때마다 함께 지내던 미군들을 떠나보냈다.
그녀는 일을 하던 중 임신을 했다. 물만 먹어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처음 알게 됐던 때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저녁이 돼 일을 나가 돈을 벌어야 했는데,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앓았다. 일을 할 수 없는 날이 계속됐고, 결국 교육받던 대로 중절 수술을 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여러 번 임신했다. 모두 중절수술을 했다.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수술했던 거야’

▲ 한 기지촌 여성의 모습.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 안정리에서의 생활
마지막으로 만났던 미군을 떠나보내고는 가장 경기가 좋았던 평택 안정리로 왔다. 그때가 서른두 살이었다. 안정리는 그녀가 지금까지 있던 곳하고는 달랐다. 천 명이 넘는 미군, 화려하게 화장한 여자들. 처음 보는 광경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차차 적응했다. 감찰을 맡아 회비도 걷고 패스(성병 검진표) 검사하는 일을 하며 다른 여성들을 관리했다. 감찰을 하며 안정리에서 있었던 많은 일을 지켜봤다. 악덕 포주들에게 맞고, 빚으로 허덕이는 여자들, 패스가 없어 끌려가고, 성병 치료를 받다가 쇼크를 받아 죽는 여자를 자주 봤다.
그녀도 성병 검진은 일주일에 두 번씩 받았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만사를 제쳐놓고 받았다. 가끔은 다른 여자들과 모여 교육도 받았다. 성병 검진의 중요성, 미군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파트 9평짜리 여러분께 다 해주겠다.”
가끔은 국회의원이 와서 외화 버느라 고생이 많다며 격려해줬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도 클럽을 떠나지 않았다. 서빙을 하는 웨이트리스로 일을 나갔다. 돈을 악착같이 모았고, 버는 대로 예금했다. 어느 날 잊고 있었던 남동생이 찾아왔다. 살기 힘드니 돈을 달라고 말했다. 소리 지르고 행패를 부렸고, 돈을 줄 때까지 계속 찾아왔다. 모아놓았던 돈을 내어줬다. 그리고 그녀는 또다시 일하고 돈을 모았다. 저녁 6시에 출근해 새벽 2시까지. 주말에는 새벽 4시까지 일했다. 밤낮이 바뀌어서 힘들고 허리가 아파도, 술병을 나르고 안주를 들었다. 협심증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던 59살, 28년간의 클럽 생활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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