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림 소비자가족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이재림(소비자가족학과 교수)

“졸업하고 뭐 하고 싶어요?”
우리 학교 새내기 여러 명을 면담할 기회가 있어서 물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꺼낸 첫 단어는 ‘엄마’, ‘아빠’, ‘부모님’이었다. “엄마가 공무원이 좋대요.” “아빠가 대기업 가래요.” 부모의 뒷바라지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진로를 선택하겠다는 ‘효자’, ‘효녀’가 많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진로 말고 본인이 원하는 진로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당황하는 학생들이 있다. 부모가 나를 위해 추천해 주는 진로가 아닌 다른 진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느냐는 표정이다.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유능한’ 부모가 증가하면서 자녀의 진로 고민을 대신해 주는 부모가 많아졌다.
얼마 전에는 친척이 전화를 했다. 대학생인 자녀가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아 얘기를 나눠 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만나 보니 진로에 대해 고민이 있는 사람은 자녀가 아니라 부모였다. 부모는 여러 가지 정보를 모으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면서 자녀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작 자녀는 부모의 그런 고민에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부모가 최선의 해답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상담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인 보웬(Bowen)은 자아분화(differentiation of self)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아분화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자, 나와 타인(예를 들어 부모)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리란 단절이 아니라 균형(balance)이라는 점이다.
한 명의 온전한 성인으로 잘 분화된 개인은 개별성을 가진 상태에서 부모와도 친밀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균형’을 유지한다. 부모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거나 부모의 의견을 경시하는 단절과는 다르다. 부모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분화(undifferentiation)와도 다르다. 부모의 뜻을 무조건 따르거나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자아분화 개념을 토대로 보면 진로에 대한 고민 없이 부모가 추천하는 진로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분화되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부모의 의견을 경청하되 진로를 스스로 탐색하고 고민하는 것이 분화가 잘 된 대학생이 모습이다. 분화가 잘 된 대학생이 생활에 잘 적응하고 행복하다는 것은 많은 연구에서 밝혀진 결과다.
어버이날이 막 지났다. 부모의 뒷바라지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진로를 성찰 없이 선택하는 것이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일까?
물론 부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하다. 부모만큼 자녀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누가 고민하고 누가 결정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내가 탐색하고 고민해서 결정한 진로라면 책임감을 갖고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탐색하고 고민해서 결정한 진로를 받아들인 것이라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충분히 갖기 어려울 수 있다. 진로를 위해 노력할 목표의식을 뚜렷하게 세우기 어려울 수도 있고,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뒤늦게 부모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자녀의 행복일 것이다. 행복한 자녀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부모에 대한 순종보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바탕이 된 부모와의 관계 맺기라는 점을 생각해볼 만한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