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운명의 변주곡
필연적 운명의 변주곡
  • 김태윤 기자
  • 승인 2014.05.26 18:47
  • 호수 15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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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라하의 봄’ 캡쳐

우리는 아주 다양한 삶의 방식을 영위하며 살아갑니다. 펼쳐져 있는 삶의 너비와 질량, 부피와 깊이 모두 달라요. 그런데 인간의 존재감이란 것은 한없이 가볍기에 이쪽에서 저쪽 세계로,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강물을 넘나들기도 합니다. 바로 ‘사랑’이란 위대한 이름으로 말이죠.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두 주인공 토마시와 테레자 역시 서로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존재감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외과의사 토마시는 깃털같이 가벼운 삶을 영위합니다. 그는 모든 정치적, 사상적 신념 따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에로틱한 불문율을 세워 사랑이란 단어를 철저히 배제시키지요. 사랑은 가벼움의 상징인 토마시가 끌어안기엔 한없이 무겁고 책임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편 시골 술집의 종업원 테레자는 신분 상승의 욕구를 가진 인물로 ‘운명’의 무거움을 믿습니다.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의 마을을 방문하게 됐고, 모든 여자에게 그랬듯 별 뜻 없이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묻습니다. 그에게 이 만남은 절대 운명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죠. 그러나 테레자는 모든 우연적 상황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를테면 토마시가 들고 있던 책 ‘안나 카레리나’,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흘러나온 베토벤 음악, 그가 노란 벤치에 앉았단 사실 같은 것들에 말이죠. 그녀에게 토마시는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아주 필연적인 존재, 그럴듯한 운명의 남자가 되고 맙니다.
 테레자가 토마시를 찾아간 그 날 밤, 둘은 잠자리를 갖게 됩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테레자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지요. 관능과 사랑을 철저히 분리했던 토마시가 그녀와의 섹스 후 강렬한 동반 수면의 욕망을 느끼게 된 겁니다. 그것은 테레자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습니다. 토마시는 테레자가 포대기에 싸여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온 아기 같다고 느끼고 그녀를 끌어안습니다. 그는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 작고 간지러운 세속의 진리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로 인해 그의 존재감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무거운 추를 달고 저 아래 테레자에게로 이끌려 내려가게 되는 것이지요.
 테레자는 낯선 손님인 토마시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을 듣습니다. 술집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현악 4중주 16번’. 베토벤 생애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 곡의 모티브는 바로 ‘Es muss sein(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즉 ‘필연적인 운명’ 인데요. ‘그래야만 하나’라고 비올라와 첼로가 무겁게 물으면, ‘그래야만 한다’라고 바이올린이 부드럽게 받는 형식으로 흘러갑니다. 베토벤은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던 가벼운 대화를 진지한 4중주로 만들어 냈습니다. 이 장난스런 독촉은 ‘반드시 그래야만’이란 어휘를 입고 어느새 무거운 모티브로 둔갑하죠. 토마시가 테레자를 끌어안으며 무거움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토마시에게 그녀는 더 이상 우연의 화신이 아닌, ‘그래야만 한다’는 필연적 존재입니다. 그는 테레자가 그의 여성 편력에 상처받아 떠나자, 알 수 없는 중압감에 그녀를 찾아 프라하로 돌아갑니다. 국경을 향해 차를 모는 그의 모습엔 ‘Es muss sein’이라는 제목의 행진곡을 연주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중첩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곡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중후한 테마에 비해 전반적으로 밝고 투명한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은 일회적이라 무게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오는 일종의 밝은 해방감이겠지요. 음악의 끝 부분에 베토벤은 이런 구절을 새겨 넣습니다. ‘괴로워하다 힘들게 내린 결심’. 호색한 토마시가 ‘여자’라는 욕망을 버리고 시골 농부의 삶을 택한 것 역시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던 순간이 무게를 더하기도 하고, 무겁게 짓누르던 굴레를 벗고 깃털보다 더 가벼워지기도 합니다. 하찮은 ‘우연’이 겹쳐 사랑이란 운명이 되기도 하고, ‘운명’에 대한 뚜렷한 자각으로 인해 미세한 우연적 요소가 가리어지기도 하겠죠. 토마시는 테레자 때문에 돌아왔고, 그의 운명 역시 변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결국 사랑하는 이의 세계로 떠밀려가고 마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인 것이지요. 오늘 밤 우연 혹은 운명처럼 다가온 ‘그대’로 인해 삶의 악보가 어떻게 변주될지, 우수 어린 상상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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