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희 인터랙션 사이언스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성대에 부임한 지 6년이 되었다. 2009년 인터랙션 사이언스 학과의 창설멤버로 부임해 6년이 흘렀다. 공교롭게도 2009년 부임 당시 성대신문 본 칼럼 란에 원고청탁을 받아 융합학과 관련 글을 기고했다. 5년이 지난 지금, 학과의 새로운 구조조정을 하는 이때 이 칼럼에 다시 글을 쓰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당시 9명 교수로 야심 차게 시작한 학과는 모든 교수가 떠나고 이제 전임교수는 필자 혼자 남았다. 이제 인터랙션 사이언스 학과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 새로운 교수를 충원하고, 새롭게 학과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5년간 우여곡절도 많았고, 내홍도 적지 않았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이 모이고, 신생학문을 잉태하는 과정의 당연한 출산의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외부에 나가 학과와 본인소개를 하면 학과에 대해 거의 모를 뿐만 아니라 연구 분야에 대해서도 생소해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인터랙션 사이언스학에 대해 무지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학과를 대학의 구조조정으로 생겼다 금세 없어지는 임시적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편견이다. 융합학과에 있는 교수도 정식 전임교원이 아닌 겸임교수 등의 학내 비전임교원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대중의 일반적 생각이 우리 대학들이 그렇게 융합학과를 편법적으로 운영해왔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최근 교육부에서 특성화사업이니 정원조정이니 하는 새로운 연구교육사업에 따라 대학가는 술렁이며 여러 학과단위가 이합집산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학제 간 장벽이 높고, 사회적으로 단일적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국내의 분위기에서 미국과 같은 융합이 융성하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현실적 한계를 실감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융합이란 현실적 사안으로서가 아닌 이상적 이데올로기로서 인식되고 접근되는 경향이 강하다. 융합을 그저 다른 것들의 기계적 결합이라고 생각하거나 융합학과를 콩 볶듯이 서류상으로 만들고 학문적 배경이 다른 교수를 임시변통으로 발령을 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기획하고 언론이 의제를 설정하여 여론을 띄우고 그래서 사회는 융합을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당위적 규범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모두가 얘기하기에 그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겠구나 하는 낭만주의적 의식이 팽배하다. 수사학적으로 융합을 얘기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한마디로 목적 지향적 융합이 부재한 것이다. 융합이 국가적 전략적 어젠더가 된 2008년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최근의 창조경제는 융합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융합에 대한 수사학적 낭만주의만 만연하고, 그래서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융합의 또 다른 이름인 창조경제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융합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융합이 일정한 영역의 도메인(Domain)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문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하느냐의 접근(problem-solving)의 문제다. 많은 사람이 인터랙션 사이언스가 새로운 로봇을 만들고, 기이한 컴퓨터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것을 만들기 위한 접근적 방법론을 융합적 통섭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창조경제든 융합이 잘되려면 그 철학적 이론적 기반 위에 사회적 인식확산이 병행되어야 한다. 경제를 부흥시키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기 위한 경제적 수단으로의 융합보다는 우리 사회에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 방법론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명륜동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필자의 국제관 연구실을 사랑한다. 연구하고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이 어울림으로서 융합의 공간에 만족한다. 융합을 수사학적으로 외치던 일부교수들이 떠난 자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5년 후 필자는 또 어디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5년 후 이 칼럼에 어떤 내용으로 기고하게 될까?

▲ 신동희(인터랙션 사이언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