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배공민 기자 (rhdals234@skkuw.com)

내 주위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이 해도 누군가는 공감하고, 누군가는 화를 낸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다르다 해서 그중 어떤 생각이 더 옳은 것이며, 내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꼽을 수는 없다. 그중에 내 맘에 드는 반응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다 각자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을 벗어난 반응은 어색하고 가식적인 반응으로 표현된다. 그림도 그렇다. 오르세 스케치를 쓰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을 때, 나는 작품을 ‘설명’하려고 했다.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나비파 같은 용어로 묶인 175점의 작품을 ‘분류’하려고 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전시장 입구를 들어섰을 때 전시장의 사람들은 모두 우아하고 기품 있게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름의 해석을 주위 사람들과 공유하면서도 그 특유의 격식과 딱딱함을 잃지 않았다. 특별히 마련된 담당 학예사의 설명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정의된 설명을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다녔다. 물론 나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녹취를 하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때까지도 나는 거장의 작품으로 가득 채워진 이 공간에 알게 모르게 압도당했나 보다. 모네의 ‘안개 속 햇살이 비치는 의회당’ 앞에 서서 이 거장이 느낀 기분은 행복한 것일까, 쓸쓸한 것일까 고민했다. 마침, 전시장을 돌아다니던 꼬마 아이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애는 “예쁘다. 성도 있고 물도 있네. 예뻐!”라고 말하고 엄마를 찾아 전시장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이가 수천억짜리 그림을 대하는 태도는 그게 전부였다. 그때부터 전시장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의 햇빛이 석양이든 아침 햇빛이든, 쓸쓸한 기분이든 설레는 기분이든 뭐가 중요할까. 그 그림에서 내가 아침의 맑은 공기를 느끼고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나는 다음날 전시장을 다시 갈 수밖에 없었다. 또 가고 싶었다. 첫 취재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어제 보았던 작품 앞에 다시 섰다. 그림에 대한 내 느낌에 솔직해지자, 화가의 특징이 눈에 보였다. 이 화가의 주제, 이 화가의 생각 그리고 기법도 눈에 들어왔다.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인상주의 같은 수식어도 처음엔 그들의 그림을 보고 만들어 낸 것이었다. 원래 있던 수식어 안에 그림들을 ‘분류’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림에 대한 내 느낌을 느끼기. 꽤 괜찮은 감상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