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파바로티 테너 조용갑 인터뷰

기자명 김은솔 기자 (eunsol_kim@skkuw.com)

 

▲ 한정민 기자 greenimjh@skkuw.com

전라남도 서쪽 작은 섬 가거도의 한 아이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공장에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세상은 어린 그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특정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철공소 용접원 △중국집 배달원 △세차 요원 등의 일을 전전해야 했다. 한동안 프로복서로 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꿈을 찾았다. 바로 ‘성악’이었다. 1997년 그의 나이 27세, 성악을 시작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에 그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로마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덜컥 합격했다. 정식 레슨을 받을 수 없어 파바로티의 테이프를 따라 연습했다던 그는 그 후 각종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성악가로 우뚝 섰다. 올해 45살, ‘동양의 파바로티’라고 불리는 성악가 조용갑 씨의 이야기다.

▲ ⓒT.O.P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성악을 해온 다른 성악가들과는 행보를 달리해왔다. 어떤 이유로 성악가를 꿈꾸게 됐나
어렸을 때는 사실 꿈이 없었다. 워낙 집이 가난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어려움이 성악가의 꿈을 갖게 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힘듦을 이겨내려고 노래했고 그러다 보니 노래가 좋아졌고… 그게 결국 꿈이 됐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교회에서 기타를 치며 꾸준히 노래했다. 본격적으로 성악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군대를 다녀온 후 23살 때부터다.

다소 늦은 나이에 성악가의 길을 결심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27살에 유학을 갔으니까, 늦은 나이였다. 주위에서도 많이 말렸다. 하지만 나는 나이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꿈을 이루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많은 사람이 꿈을 이루는데까지의 기간을 설정하는데, 그건 진정한 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꿈은 기간·나이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나 역시 나이가 많았어도 결국 하고 싶었던 성악을 하게 됐으니 꿈을 이룬 거다. 내가 늦은 나이에 성악을 시작하며 가졌던 꿈은 오페라에 한 번이라도 서보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있으면,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으면 그것은 두려워할 게 아니라 행복해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노래 장르 중에 특별히 성악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 성악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는가
성악은 일반 대중가요보다 더 고전적이면서 쉽게 부를 수 없다. 대중가요는 유행을 타서 시간이 지나면 질리기도 하지만, 클래식은 그렇지 않다. 오래 불러왔던 곡을 계속 불러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 오히려 클래식은 반복해 부를 때마다 ‘된장’처럼 묵은 소리가 난다. 그런 것에 흥미를 느껴서 계속 듣고, 부르는 걸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매우 힘들게 자랐다고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 성악가의 길을 준비했나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장사하고, 저녁에는 야간학교에 다녔다. 연습할 시간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자는 시간을 쪼개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혼자 연습했다. 레슨받을 돈이 없어서 음반가게에서 테이프 하나를 사서 틀어놓고 계속 따라 불렀다. 노래 봐주시는 선생님들을 무작정 따라다니면서 배우기도 했다. 10년을 그렇게 하다보니까, 결국 길이 열리더라. 이런 나를 10년 동안 지켜보셨던 목사님이 ‘이만하면 키워볼 만하겠다’라며 유학비를 대주셨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겪은 어려움이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생각하는가. 성악가로서 그런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악가가 되기 전에 프로복서로 활동한 적이 있다. 권투를 통해 얻은 점이 많다. 운동은 한계를 극복하는 힘을 갖게 한다. 오늘 여기까지 뛰었으면 내일 이기기 위해 이것보다 1보는 더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뛰다 보니까 반복적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익숙해졌다. 또 계속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래서 사람은 발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젊어지고 싶다. 예전만큼의 연습량은 아니지만 지금도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틈틈이 연습한다.

지금은 동양의 파파로티로 불리며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공했다. 성악가의 길을 걸으면서 겪었던 슬럼프가 있었나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성대가 완전히 망가진 일이 있었다.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들어가고 약 1년 후였는데,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하루 8시간 이상 진성으로 노래연습을 하다 보니-목소리가 안 나오게 됐다. 병원에서는 성대 결절이라며 수술을 권했다. 결과적으로는 6개월 후에 자연적으로 목소리가 돌아왔는데, 그 6개월이 슬럼프였다. 소리를 잃으니 성악가로서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하루에 한 음씩 돌아오더라. 음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때 알았다. 사실 예전에는 노래를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노래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항상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게 됐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에 콩쿠르에서 28차례 우승했다.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
이탈리아에 있을 때 어떤 콩쿠르에 나갔는데 돈이 없었다. 있는 돈이라고는 참가비 100유로뿐이었다. 콩쿠르 준비를 위해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도 없었다. 그래서 숙소없이 한동안 차에서 자고 공중화장실에서 씻고, 밥통에 밥을 해 반찬 없이 고추장에 비벼 먹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실패를 준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혹시나 떨어질까 두려워 이렇게 비참하게 먹고자는게 아니겠나. 그 순간 ‘왜 내가 실패를 준비하고 있지? 성공을 준비하자’는 생각을 했고, 눈 앞에 보이는 호텔에 들어갔다. 호텔비는 후불제니까 콩쿠르 우승금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금을 받을 날을 체크아웃날짜로 정하고 콩쿠르 기간 내내 호텔에서 지냈다. 결국 1등에 내 이름이 발표되고 상금을 받아 호텔비에 팁 100유로까지 내며 나왔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우승 못 하면 감옥 가지 뭐’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감옥에서는 적어도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나.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는 추방할 때 비행기 표도 끊어준다. (웃음)

앞으로 성악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나
사실 ‘성악가 조용갑’으로만 남고 싶지는 않다. 성악가도 결국 ‘노래하는 사람’ 아닌가. 특정 장르를 떠나 모든 장르를 다 노래해 보고 싶다. 지금까지 오페라를 해왔으니까, 이젠 대중음악도 해보고 싶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께 못 불러드린 곡이 많다. 내가 어렸을 때 저녁마다 술 먹고 오시면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하셨다. 세상이 워낙 고달파서 위로를 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성악가가 된 지금은 아버지가 안 계신다. 유학 가기 전에 돌아가셔서 내가 이렇게 노래를 잘한다는 걸 모르실 거다. 그래서 아버지께 불러드리고 싶은 노래가 많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트로트뿐만 아니라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노래도 모두 소화하는 가수가 되는 게 꿈이다. 내년쯤에 트로트 곡 발매도 생각 중이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와 제자양성에도 힘쓰고 있다고 들었다. 어떠한 생각으로 제자 양성을 하고 있나
조용갑 성악 스쿨을 만들어서 현재는 40~50명 정도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이 형편이 어려워 어렸을 적의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중간에 온 사람들이다. 정말 다양한 사연을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정육점 주인이나 태권도 관장으로 일하면서 성악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고. 또 한 분은 60대 인데, 노래를 그냥 좋아서 부르다가 나를 만나고 실력이 확 좋아진 분도 있다. 지금은 웬만한 성악가보다 노래를 잘한다. 이렇게 특별한 인생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음악회도 할 계획이다. 이 중에 실력이 있는 사람은 7명 정도 생활 장학생으로 가르치고 있다. 나중에는 유학까지 보내주려고 한다. 적은 돈으로도 성악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다.
 
요즘은 여러 사람에게 본인의 인생이야기를 살려 강연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대학생 중에서도 아직 꿈을 찾지 못하거나 현실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당장 현실이 힘들다고 해서 꿈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머리로 계산하고 지레 꿈을 포기하지 말고, 무엇이든 가슴이 뛰는 일이 생기면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으면 한다. 하다 보면 현실은 바뀌기 마련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은 가난하다. 나는 여자니까 혹은 남자니까’ 이런 식으로 머리로 계산하며 쉽게 꿈을 포기하는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은 똑똑해 현실 파악이 너무 빠르다. 그렇게 조건을 재다 보니 꿈을 가질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우직한 마음으로 뚝심 있게 꿈을 위해 달리다 보면 현실이 바뀌고, 도움의 기적도 일어나고, 꿈도 이뤄지기 마련이다. 물론 사회 자체가 젊은이들이 꿈꿀 수 없게 몰아세우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은 꿈을 가져야 한다. 가슴이 뛰는 일에 무한한 열정을 가지고 살다 보면 그 꿈은 언젠가 꼭 이뤄지게 돼 있다. 나도 현실은 마이너스 통장이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유학의 길이 열렸다, 열심히 자신의 꿈을 위하다 보면 그 열정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생각보다 주변에 도움을 줄 사람은 많다. 그러니 현실을 원망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정말 꿈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충분했는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