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철학10)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스피노자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데카르트에 맞서 사고대상과 현실대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말은 현실의 개는 짖지만, 관념 속의 개는 짖지 않기에 현실과 관념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대학생은 그저 도구다.’란 제목에 초장부터 스피노자 얘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대학에서 부딪히는 혼란과 부조리를 설명할 단초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대학이란 어떤 공간이고 대학생이란 어떤 존재인지 사고대상과 현실대상을 구분해 생각해야 한다.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모두가 지성과 학문의 전당이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실제 어떤 곳인가?’라 묻는다면 취업을 예비하는 공간이라는 답이 현실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니는 대학은 사고대상이 아니라 현실대상일 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디서 오는가’란 기사가 인문학의 침체를 고민했다면 현실적인 대답은 인문학이 취업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고, 단지 그럴 뿐이다. 여기엔 인문학에 대한 호불호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기에, 아무리 인문학적 가치의 당위성(호불호)을 얘기해도 그건 현실이 굴러가는 방식과 괴리되었기에 힘이 없다.
대학생은 이런 맥락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아니라 대학의 온갖 실적을 위한 도구다. 원남동 글로벌 센터 관계자가 보이는 모습은 이를 반증한다. 학문의 전당 대학이었다면 대학생들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대학에 기숙사가 있고, 이를 사고 없이 잘 운영하는 게 제1의 목표라면 불시에 방 점검을 하거나 주류 소지를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대학생은 현재 오로지 관리의 대상이며 실적을 내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 대학의 예체능·인문·사회 계열의 전임교원 확보율이 낮은 것도 절대 학교가 태만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충실하게 일류 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학 계열이나 이학·공학 계열로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란 말은 공허하다. 이미 대학은 자신의 현실적 목적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냉소에 빠지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현실의 논리에 따라 굴러간다는 말이 사고대상이 허상, 환상이란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고대상은 우리의 지향이 될 수 있다. 다만 이상을 현실화하는 건 현실대상과 사고대상을 구분하고, 현실대상의 논리를 제대로 인식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대학이 취업률을 비롯한 실적에 집착한다면 그 연유는 무엇인가? 지금의 방식으로 대학이 굴러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물론 실현가능한 현실의 방법으로 말이다.
냉소에 빠질지 현실을 고민하며 대안을 만들어갈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대학생이 실적을 위한 도구로 비치될지 이상적인 대학의 모습을 현실화해 학교의 주인이 될지 모두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