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자투리’속 자리한 생활 예술의 손길
마을‘자투리’속 자리한 생활 예술의 손길
  • 김태윤 기자
  • 승인 2014.09.24 11:20
  • 호수 15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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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마을의 재생, 창신동 ‘000간’ 스케치

낙산 공원 너머, 서울 성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종로구 창신동. 원단을 담은 비닐 포대를 싣고 수십 대의 오토바이가 비탈진 언덕길을 넘나든다.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박는 소리만이 쉼 없이 울려 퍼지는 거리엔 간판 하나 달리지 않은 무채색의 봉제 공장이 줄지어 있다.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아늑한 건물 하나. 바로 대안적 생산을 위한 문화예술 플랫폼, 창신동 ‘000간’이다. 비어있는 봉제마을 창신동을 예술로 덧칠하며 재생의 손길을 건네는 000간을 찾았다.

삭막한 모습의 창신동은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동대문 의류단지의 호황에 힘입어 활기를 띤 곳이었다. 그러나 *패스트패션의 범람과 함께 패션산업이 대형 유통업의 형태를 띠면서 국내 의류산업은 불황을 맞았고, 창신동 역시 고스란히 그 타격을 떠안아 쇠락해갔다. ‘000간’은 산업화의 주역으로 역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던 옛 봉제공장의 흔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녹슨 누전차단기와 쇠 옷걸이, 벽에 비스듬히 걸린 형광등과 낮은 천장. 가만히 눈을 감자 재봉틀을 돌리던 주인부부의 빠른 손놀림이 아른거린다. 낡은 재봉틀 판은 공간 한복판에 놓인 책상으로 활용됐다.
가게 안쪽에는 다양한 패턴의 자투리 천이 담긴 선반이 놓여 있다. 000간은 봉제공장에서 쓰고 남은 자투리 천 조각을 이용해 방석과 브로치를 제작한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22톤의 자투리 천을 활용한 것이다. “봉제공장 사장님이 쓰고 남은 원단을 재단기로 잘게 잘라 주세요. 그걸 큰 포대에 5000원씩 들여 사와요. 쓰레기로 버려지는 자투리 천을 줄이자는 의도죠.” 투명한 방석 속을 꽉 채운 화려한 천 조각에 시선을 빼앗긴 기자를 봤는지, 직원이 말을 건넸다. 오른쪽 벽면엔 파란색, 흰색, 회색의 셔츠가 걸려 있다. 버려지는 천이 5% 이하가 되도록 디자인된 ‘제로웨이스트 셔츠’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고민에서 출발했어요. 동대문 휴가철 같은 비수기에 일감이 적은 봉제공장과 함께 제품을 제작해요.” 제로 웨이스트 셔츠는 자투리 원단을 줄인 친환경 슬로우패션인 동시에 지역의 비수기 문제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안인 것이다. 줄지어 걸려 있는 에코백 하단의 양 모서리는 삼각형 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자투리가 생기지 않도록 독특한 디자인 요소를 살린 것이다. 원래라면 버려졌을 자투리 천은 천진한 아이들이 그려진 파우치 속 수납 주머니로 활용됐다.
조심스레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 벽에는 ‘49mm, 146장, 102%, 절개’ 등 과거 봉제공장 주인이 써 놓았던 옷의 치수와 거래처 정보가 적혀있다. “2층에선 주민들이 차를 마시며 마을 회의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을 위한 미술 교육이 무료로 진행되기도 해요.” 지난 8월 000간은 부모들 대부분이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는 지역 아동들을 대상으로 ‘마을이 배움터’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삼거리 공터와 동네 곳곳에서 함께 공을 차고, 춤을 가르치고, 어우러져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아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홍키다리 아저씨!” 바로 미술선생님인 000간 대표 홍성재씨의 별명이다. 얼마 전에 열린 마을 축제에서는 아이들이 그린 ‘창신동 수호신’ 그림을 원단에 프린팅 해 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한편 000간에서는 이름 없는 봉제 공장에 활력을 불어 넣는 ‘거리의 이름들’이란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이곳의 공장은 사업자 등록이 안 된 곳이 많고, 거래처 또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 대부분 간판이 붙어있지 않다. “신진디자이너들이 작업을 의뢰하고 싶어도 어느 곳에서 어떤 옷을 전문으로 하는지, 연락처는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경관 개선도 하고 외부와 공장을 잇는 플랫폼 역할을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했어요.” 화분 위에 꽂힐 삼각형의 깃발 간판은 봉제 공장의 분위기에 맞춰 옷감의 질감을 살렸다. 첫 선물의 주인공은 000간의 앞집 이웃 ‘이삭’ 봉제공장. “간판을 만들어 놓으면 깔끔해 보여 좋아요. 평소 화초 기르는 것을 좋아해서 항상 예쁘게 관리하려고 하죠.” 일감을 손보던 ‘이삭’ 아저씨가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큰 비닐 포대 안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지원하는 파란색 티셔츠들이 담겨 있고, 창고에 가득하던 자투리 원단은 한데 모여 예쁜 방석으로 탈바꿈했다. 플랫폼 안에선 주민들과 아이들의 작은 웃음이 피어난다. 쇠락하는 봉제 마을 창신동을 문화의 손길로 채우는 ‘000간’. 언덕 너머로 저물어가는 노을은 다시 떠오를 창신동의 초저녁을 은은히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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