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영화 ‘도희야’ 감독 정주리(영상 99) 동문

기자명 조원현 기자 (wonhyun4343@naver.com)

“영화 데미지(1992)의 마지막에 줄리엣 비노쉬 클로즈업 장면이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극장에 갔던 정주리(영상 99) 동문은 작품에서 느낀 형언할 수 없는 자극과 색다른 경험에 같은 영화를 3번 연달아 관람했다. 비디오를 좋아하던 아버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접했던 그녀는 항상 영화에 매력을 느꼈고 감독의 꿈을 가졌다. 결국, 그녀는 지난 5월 본인의 첫 장편영화 ‘도희야’로 칸국제영화제에 입성했다.

▲ 정 동문이 자신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현웅 기자 dnddl2004@skkuw.com

다변했던 대학생활, 무변했던 꿈
정 동문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재수 끝에 우리 학교 영상학과 2기로 입학했다. “당시 영상학과는 25명의 소수인원이었지만 독립적이고 단결력이 강했어요”라며 자부심을 드러낸 그녀는 대학 시절 영상매체 전반에 대해 공부하며 영화소모임을 결성해 활동했다. “영화에 관심이 있던 친구들끼리 자유롭게 모여 8mm 캠코더로 영화를 만들었죠.” 그러나 영상공부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과목은 신경 쓰지 못했고 그 결과 학사경고가 누적돼 제적당하기도 했다. 1년간의 제적기간 후 재입학 심사에서도 탈락한 그녀는 한 학기를 더 쉰 뒤에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모님께는 휴학했다고 말씀드렸지만 결국 들켜버렸어요.” 그녀는 이 기간에 지난날을 돌아보며 앞날에 대해 고민했다. 재입학 후에는 서양철학을 복수 전공하며 학사공부에 힘을 쏟았고 우리 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에서 교지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영화감독의 꿈을 놓지 않고 그대로 간직해나갔다.

뚝심의 영화학도, 칸으로 가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인의 꿈을 실현하기에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막막한 앞길에 방황하던 그녀는 고민 끝에 영화를 더 심도 있게 배워봐야겠다고 결심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의 문을 두드렸다. 정 동문은 그곳 영상원에서 전문사 과정을 밟으며 3편의 단편영화 △영향 아래 있는 남자(2007) △11(2008)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2010)를 연출했다. 특히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 ‘영향 아래 있는 남자’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했다. “본격적으로 만든 첫 영화가 상을 받으니 어안이 벙벙했어요.” 그러나 모든 작품이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단편영화인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는 관객에게 다가갈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단편영화의 현실상 상영 여건이 열악했고 작품의 주제도 관객에게 큰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와 한예종에서 배운 것을 마무리 짓고 앞으로의 작품세계를 다지고자 만든 영화가 관심을 얻지 못해 속이 상했어요.” 정 동문이 이 작품에 더 애착을 갖게 된 이유다.
한예종 영상원을 졸업한 뒤에도 그녀는 생계유지를 위해 그곳에서 약 1년간 편집조교로 일했다. 이 시기는 그녀 인생의 암흑기로 남아 있다. “그 무렵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해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렸고, 대학교 동기들은 꿈을 접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반면 이렇다 할 경험도 없고 나이가 적은 편도 아니었던 그녀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여느 영화학도처럼 꿈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들 법한 상황이었지만 정 동문은 시나리오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작품을 쓰는 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 성격이 워낙 무뎌서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특유의 담담한 성격으로 주변에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고집해 나갔다.

▲ 지난 5월 제67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 초청된 영화 '도희야' 포스터. /ⓒ 정주리 제공

이런 열정과 노력 끝에 그녀의 첫 장편 시나리오 ‘도희야’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는 한예종과 CJ E&M이 추진한 ‘장편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 및 영화 제작 공동개발 사업’ 제1기 기획개발작으로 선정돼 영화화됐다. ‘도희야’는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폭력과 무관심에 버려진 도희라는 아이와 깊은 상처를 간직한 파출소장 영남이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그녀가 젊었을 때 들었던 한 우화다. 주인의 관심을 원하는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 그의 구두 안에 넣는다는 이야기에서 영화 속 인물들과 내용을 이끌어낸 것이다. “우화에서는 주인이 죽은 쥐를 보고 경악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나아가 주인이 고양이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작품을 썼어요.” 이 영화는 개봉 전인 지난 5월 제67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돼 상영된 후 외신 기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지난 8월에는 암스테르담 영화제에도 참가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가 우리 사회 내 소수자들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평가한다. 영화에서 △도희가 마을에서 외면받고 방치된 아이라는 점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나온다는 점 △영남이 동성애자라는 점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자극적인 캐릭터를 설정한 이유는 인물의 외로움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만들었다기보다는 각자의 상처를 간직한 두 사람이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고 공감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도희야’는 이렇게 극악한 상황에서 서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정 동문과 영화 '도희야'의 배우들. /ⓒ 정주리 제공

관객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영화
첫 장편 데뷔작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녀는 이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도희처럼 미성숙한 존재의 아이가 주변 사람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어요.” 차기작 작업에 있어 칸영화제에서의 경험은 그녀에게 큰 용기가 됐다. ‘도희야’에서 작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해줬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고 소소한 것이라도 깊이 있게 파고들면 어디선가는 공감해주지 않을까 싶어요.”
그녀가 생각하는 영화의 매력은 ‘현실 속에서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관객들은 SF영화도 그 안에서 나름의 현실이 있기를 바라는데, 그 현실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순간들을 논리적 모순 없이 풀어주는 것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언제나 관객의 위치에서 작품을 대한다. “저는 감독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쓰고 촬영해요. 어딘가에는 나 같은 관객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는 거죠.” 이렇듯 그녀가 관객으로서 동경하며 봤었던 작품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정 동문의 목표다.

꿈을 쉽사리 놓지 말라
정 동문은 꿈을 잃고 사는 후배들에게 ‘꿈을 놓지 말라’고 말한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는 IMF 위기 직후로 심한 경기불황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의 꿈을 좇기 보다는 취업을 준비하기 바빴다. 그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학생들도 거스를 수 없다는 듯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가는 현실이 슬프다”며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라고 조언한다. “저는 26살 때까지는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 이후에는 그것들을 분출하려 했어요. 사회가 잘못되긴 했지만, 학생들은 그 시기에 할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놓치지 말고 접했으면 해요.”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꿈을 향해 걷고 있는 정 동문. 막연한 생각을 현실에 옮기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녀의 열정은 이제 시동을 걸었을 뿐이다. 그 열정과 뚝심이 ‘도희야’를 넘어서는 작품을 낳아 하루빨리 우리 앞에 돌아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