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근(동양철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미국의 수사 드라마를 보면 범죄와 사고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사람이 죽었을지라도 범죄는 의도적으로 일어난 일이고, 사고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용의자는 ‘accident’라고 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다소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의도적 행위와 우연적 사고는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사고(事故)였으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고 이후의 신고, 조치와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의도와 방치 여부 등을 정확하게 가려내야 할 것이다. 사망이 사고로 일어날 수 있지만 사망 이후의 수습은 의도적으로 방치되고 고의적으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당사자들은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법정에서 책임을 가릴 때가 되면 다들 고의가 아니라 사고였다는 말을 즐겨 쓴다. 그리하여 ‘명백한 죽음은 있지만 결정적 원인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는’ 기이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28사단의 윤일병 사망은 처음에 사고로 알려졌다.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질식사한 것이다. 이렇게 처리되던 사건이 김상병의 신고로 살인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김상병은 사건의 진상을 듣고서 신고를 한 결과 지속적인 구타에 의한 살인의 가능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윤일병 사망 사건은 군내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 중의 하나로 묻힐 뻔하다가 이제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앞으로 군사법원이 적정한 절차를 거쳐서 가해자의 위법 행위와 처벌을 엄정하게 판결할 것이다. 법원의 판결로 사건이 공식적으로 종결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이렇게 종결해버리면 우리는 반인문학적이며 반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적어도 대학 사회는 두 가지 사항을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우리 사회의 폭력 성향이 일어나는 원인과 그 의미를 성찰해야 한다. 둘째, 대학이 학생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윤일병사망은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반복적으로 당해서 사망하게 되었다. 우리 중에 일부는 군내의 모든 병사가 폭력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윤일병사망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자기 조절 능력이 없고 센 척하는 일부 병사의 문제로 간주된다. 이것은 우리가 가해자를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몇몇 끔찍한 괴물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다수의 선량한 병사는 오늘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태 파악은 한 병사가 극도의 공포감과 무기력감에서 죽어가는 상황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폭력이 일회적인 일을 넘어서 상습적이 되도록 방치되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학문은 폭력을 거리낌 없이 행사하고 그러한 폭력에 의해 공포감이 하나의 집단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 인문학은 대중 강연에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가혹 행위를 무반성적으로 지속할 수 있을까?” “사람은 부당한 가혹 행위를 목격하고서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할까?”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회심리학은 폐쇄적 공간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살상의 폭력적 성향을 행동으로 드러내게 되는지 탐구해야 한다.
아울러 대학은 우수 학생을 받아들이는 입시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입학한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일병 사망은 불행하고 참담한 사건이다. 사건을 접하며 절망만이 아니라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사건을 주도한 가해자도 있지만 양심에 따라 용기를 발휘한 김상병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사회는 분명 폭행을 주도하거나 사건을 은폐한 장병이 아니라 사건을 신고한 장병을 길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재난과 폭력사건이 일어나면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학 교육이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짚어봐야 한다. 

▲ 신정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