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신문의 역사 5 - 1994 ~ 2003

기자명 조수민 편집장 (skkusue@skkuw.com)

흔히들 1994년부터 2003년은 학생 운동이 저물어 가는 시기로 여기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시는 학생운동을 하는 세력과 소위 ‘비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시점이었다. 80년대 학번의 경우 대학생이 학생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면, 90년대는 IMF 등 국가적인 상황이 겹치며 각자의 현실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다. 그런 와중에 “아직 사회 정의가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학생들과, 개인적인 생활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대신문도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90년대 중후반, 끝나지 않은 학생들의 외침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학생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임재문(물리 95) 동인은 “우리도 형식적으로는 민주화를 갖춘 게 됐는데, 더 이상 학생운동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느끼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1992년까지 상당히 격렬하게 진행됐던 학생 운동은 잠시 주춤하다가 1995년도 노태우와 전두환의 내란음모 사건과 1996년 연세대 8.15 통일 대축전을 계기로 다시 불붙게 된다. 당시 성대신문 기자들은 이러한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담기 위해 시위 및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 취재했다.
1996년 연세대에서 벌어진 8.15 통일대축전 때도 성대신문 기자들은 그곳에 있었다. 임재문 동인과 몇몇 후배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전야제가 시작하는 14일 저녁에 연세대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정부에서 갑작스럽게 통일대축전을 ‘불법 집회’, ‘이적 행위’로 규정하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정문을 막고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정문 앞에서는 반발하는 학생들과 전경이 한데 뒤엉켜 싸움을 벌였고, 하늘에서는 헬기가 최루 가스를 뿌렸다. “최루가스를 한번 맞으면 팔에 수포까지 생길만큼 좋지 않아요. 학생들은 최루 가스를 피하면서도 학교 밖으로 나가기 위해 전경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죠.” 그런 와중에서도 취재를 마치고 기사를 작성해야 했던 임재문 동인과 후배 기자들도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편집장에게선 계속 빨리 돌아오라는 ‘삐삐’연락이 오는데, 전경들에 막혀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문에는 전경이, 후문 뒷골목에는 사복 경찰이 좍 깔려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임재문 동인에게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전남대 신문사인 <전대신문> 전 편집장 출신인 한 여성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후문 근처에 서성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임재문 동인에게 사정을 들은 그녀는 임 동인과 후배들이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 “그녀가 우릴 데리고 올라가 최루 가스 흔적을 없애도록 씻게 해주고, 밥까지 먹여줬어요. 옷까지 새로 줘서 입고, 아는 사람을 불러서 차를 태워줘 겨우 탈출할 수 있었죠.” 결국 임재문 동인과 후배들은 그렇게 탈출했지만, 연세대 사태는 5, 6일간 이어졌다. “기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긴 했지만, 안에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때 학생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 정부는 전기를 끊고, 단수까지 하는 등 강경하게 학생들을 진압했다. 그게 당시 학생 운동 사회의 풍경이었다.

▲ 1996년 8월 15일 일어났던 연세대 통일대축전 사태를 보도한 성대신문.

 
2000년대에 접어들며, 사회와 현실의 괴리
한편 신문사 내부 분위기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뿌연 시대였어요. 신문사 밖에선 최루 가스로, 신문사 안에선 담배 연기로 말이죠.” 금연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신문사 내에서 자유롭게 흡연이 가능했다. 월요일부터 금, 토, 일까지 이어지는 고된 일정 속에서 신문사 기자들은 모두 담배를 집어 들었다. “금연 문화가 발달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고된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다들 한두명씩 담배를 입에 물곤 했어요.”
기자들을 괴롭게 하던 것은 신문사 일 뿐만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과도기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대신문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느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신문사 기자들도 ‘괴리감’을 느꼈다. 사회적인 책무를 다하기 위해 아직은 운동을 이어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와, 현실적으로 개인 생활을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민에서 오는 괴리다. 임재문 동인은 “ IMF까지 터지며 취업하기가 정말 어려워졌어요. 신문사 기자들이 아닌 과 동기들을 만나면, 너는 왜 외딴 행동을 하냐는 말을 듣기도 했어죠. 그러면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임 동인은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성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얻은 나름의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자신만의 철학을 확보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불안감 속에서도 성대신문 기자들은 활동을 이어나갔다.

▲ 1998년 5월 18일 건학 600주년을 맞은 제1230호 성대신문 '심산의 터'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사진으로 되돌아봤다.

 

 

 

 

 

 

 

 

 

 

 

 

 

뜨거웠던 사회 분위기, 신문에 고스란히 담겨
우리 학교의 경우 90년대 초반만 해도 ‘데모하는 대학’으로 유명했다. 1991년 김귀정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학생의 반이 나가 데모를 할 정도로 학생 운동의 열기는 엄청났다. 임재문 동인은 당시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기’라고 회고한다. 이러한 학생들의 목소리는 성대신문에 고스란히 담겼고, 학교 측에서도 그것에 대해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억압하는 건 학교도 어려운 일이었죠. 교수님들도 오히려 학생들의 사회 운동을 독려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편집 자율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도 90년대 말이 되면 확연히 바뀌게 된다. 전국적으로 학교 학보사들에 대한 학교 측의 개입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신성식(국문 98) 동인은 “우리 신문은 그래도 오래 버틴 편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 학교도 이를 피하지는 못했다. 1998년 2학기 종간호에 실린 ‘조선일보에 반대한다’는 사설로 인해 배포 중지를 당하게 된 것이다. 주간교수에게 ‘OK’사인을 받아 인쇄까지 완료됐지만, 학교 측에서 그것을 반대했다. 기자단은 그에 대해 반발하고 ‘편집자율권투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당시 주간 교수와 편집장, 그리고 부장단이 돌아가며 쓰던 ‘사설’을 쓸 수 있는 사설권이 주간 교수에게 넘어가게 됐고, 당시 데스크단 기자들은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본래 기자단 내부에서 진행하는 편집회의와 별도로 <주간회의>가 새롭게 생겨 편집장 및 데스크단이 참여해 주간교수와 신문에 실릴 사안에 대해 미리 논의하는 자리가 생겼다. 신성식 동인은 그 시기를 기점으로 신문사에 대한 학교 측의 관여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토요일 밤마다 주간교수와 문구 하나, 헤드라인 하나를 가지고 논의하느라 10~12시간을 책상에 앉아있었어요. 쉽지 않은 상황이었죠.” 2000년대에 들어서며 성대신문은 학생 운동 시기와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바로 ‘편집권’이라는 장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