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물목 - 정호열 (법학)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몇해전 가을일이다. 정부 초청으로 온 공정거래법 전문가 몇분을 어렵사리 모시고 학회를 열었다. 고마운 마음에 성균관을 안내하고 북촌에서 칼국수를 대접하기로 했다. 조선판 빵떼옹이며 왕립 교육기관이었다는 등 마음을 기울인 설명을 마칠 무렵 비가 내린다. 우산을 찾아 연구실로 올라오는 토요일 오후 법학관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나를 마주친 아이들이 단정하게 인사들을 했다. 뜻밖에도 미국 연방거래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한 분이 대놓고 부러워한다. 자기 학생들은 도대체 인사를 할 줄 모른다는 거다.
마음이 뿌듯했다. 600년 성균관의 전통도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미국인은 군사부일체의 한국적 전통을 알까, 50년이 지나 이 땅에 수평적 시민사회가 깊어진 뒤에도 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처럼 인사할까.
정도전, 조준 등이 기획한 조선은 오늘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공동체운영에 관한 한 달라도 너무 달랐다. 주자의 가르침을 체득한 군주가 자급자족의 소농(小農)들을 다스리면 유토피아가 될 것으로 믿었다. 인간관계는 상하의 신분으로 구구절절 묶었다. 유동성을 만들어내는 상거래와 상인은 천대의 표적이었고, 성리학 이외의 사상과 언론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형과 유배의 제물로 삼았다.
1894년 이자벨 비숍이 한강상류로 여행하기 위해 영국돈 10파운드를 엽전으로 환전하였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6명의 인부가 지고 나머지는 조랑말 한 마리에 실었다고 기록한다. 참담하게도 나라를 세운지 5백년이 지나도록 조선은 제대로 된 통화를 알지 못했다. 거래다운 거래가 없으니 금화나 은화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외뿔 달린 기린과 함께 성군은 오시지 않고, 그릇된 근본주의와 썩은 지배구조 속에 건실한 기풍은 사라지고 온 나라가 물로 씻은 듯 핍절했다.
학교 곳곳에 걸린 수기치인(修己治人)이란 액자를 볼 때마다 부담스럽다.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하자’로 읽을 것 같아서다. 그렇다고 입즉효 출즉제(入則孝 出則悌)로 읽는다면 이건 시대착오다. 중앙도서관 앞 좁은 공간에는 심산 선생이 불편한 자세로 서 계신다. 일제의 고문으로 하반신을 못썼던 이 고결한 어른을 6백주년 기념관 앞에 남향으로 단정하게 앉혀 드리면 좋겠다. 조국의 미래를 가리키는 눈빛과 손길이라면 더욱 좋겠다. 우리 모두 다짐하듯 성균관대학교는 세계 일류의 보편대학을 지향한다. 정문도 훤하게 다듬은 이 때 정체성위원회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 전통가치의 요람으로서 책무를 다지고 90년대 중반 대학평가에 맞추어 급조한 대학이념도 다시 손보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