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소 - 김영길 (국문 10)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강의실은 어떤 공간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강의실은 강의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다른 설명을 보태기 힘들만큼 명확한 사실이다. 이처럼 강의실이 강의를 위해 쓰이는 공간인 게 확실하다면, 강의실의 의미가 강의를 하는 곳으로 그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의를 하지 않는 시간의 강의실은 어떤 공간일까. 강의자와 수강자가 만나지 않는 시간은 빈 시간이며, 그런 공간은 목적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공간일까.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강의하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강의실은 강의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 시간에 강의실은 학습할 공간이 여의치 않은 이들에게 열린다. 동방이나 과방이 없는 학회와 동아리들에게, 하나의 자치 단위로 포괄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 강의실은 학습할 공간을 제공한다. 이때 우리는 강의실을 강의뿐만이 아니라 학습이 이뤄지는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에서의 학습은 어떤 것일까. 먼저 강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스터디나 세미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우리는 공부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많은 것들을 배운다. 대성로를 지나다 우연히 본 누군가의 대자보를 통해 문득 안녕하지 못함을 확인하기도 하고, 과 문화에 불편함을 느끼고 다른 대안적인 공간을 고민하기도 한다. 이것들 역시 대학에서 가능한 학습이다. 대학에서의 학습은 그 공간을 점유하는 모든 시간에서 가능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포괄한다.
  하지만 대학에서의 학습이 그런 것이라고 해서 모든 학습이 학습의 공간인 강의실에서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어떤 학습이 이뤄질 수 있는 학내 공간이 강의실밖에 없다면 강의실은 학습의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 국민간담회>를 기획할 때 꼭 인문관 강의실에서 진행되어야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모든 대학건물과 본부에 공간대여를 문의하고서야 알게 된 건 강의실밖에 그런 장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육십 명 정도가 영상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강의실 외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강의실에서 불가능하다면 학내에서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은 이제 몇 개 남지 않는다.
  누군가는 다른 지식이나 경험들은 대학이 아닌 곳에서 얼마든지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왜 대학에서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누구도 대학에서 모든 지식과 경험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고민과 실천을 자신이 점유한 공간에서 이어나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시간과 공간의 성격을 변화시키려는 몸부림을 그저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흘겨볼 순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질 수 있고 가져야하는 권리가 무엇인지를 떠나서 학교에서 학생이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학생’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지금 강의실이, 그리고 대학이 ‘정치적 공간’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건 학교가 원칙을 지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생은 허락된 권리만을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것만을 배우는 존재가 아니다. 학교는 학생이 학생으로서 필요로 하는 공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비록 그게 강의실은 아닐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