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스케치 - 광주비엔날레 ‘터전을 불태우라’

기자명 송윤재 기자 (songyoonjae92@skkuw.com)

1전시실: 광주 비엔날레, 그 파격적인 서막.

어두운 입구, 빨갛게 물들어 타고 있는 창문만이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있다. 잭 골드스타인의 ‘불타는 창문’이 ‘터전을 불태우라’의 시작을 알린다. 붉게 일렁이는 창문에서 불타는 화염이 연상돼 어느새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어디선가 우렁찬 행진곡 소리가 들려오고 벽 사이로 번쩍이는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온다. 방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는 이 전시물은 에드워드 키엔홀츠와 낸시 레딘의 ‘오지만디아스 퍼레이드’로 국가폭력에 대한 거침없는 폭로를 담았다. 하얀 말에 거꾸로 매달려 전진을 외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건 대통령. 그 뒤에 군복을 입은 두 장군 역시 말을 거꾸로 타거나 해골에 올라타 있다. 해골은 정치적인 압력에 따르는 납세자를 형상화했다. 세 인물은 화살표 모양의 무대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행진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No’가 적힌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는 곧 작품이 전시된 나라의 정부가 정당한가에 대한 국민들의 대답이다. 다시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자 쥐의 얼굴을 한 인간 피규어가 군대처럼 도열하듯 줄을 맞춰 서 있다. 바로 제인 알렉산더의 ‘심포지엄’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어난 아파르트헤이트를 표현했다.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군대의 모습은 독재정권의 기반인 군대 권력을 상징한다. 이들이 주시하고 있는 곳에는 머리에 나무가 자라난 피규어들이 서 있다. 이때 떠오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에서 마녀는 왕에게 숲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숲은 알고 보니 위장한 적의 비밀 군대였다. 맥베스에서 차용한 피규어들은 국가 권력은 군대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권력의 부질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 에드워드 키엔홀츠와 낸시 레딘 '오지만디아스 퍼레이드 /'한영준 기자 han0young@
 
▲ 제인 알렉산더 '심포지엄' /한영준 기자 han0young@
 
2전시실: 국가에서 일상의 문제로 빠져들다.
 
전시실 입구, 목젖을 닮은 거대한 조형물인 피오트르 우클란스키의 ‘무제(크게 벌려)’는 관객에게 전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상기시키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천장에 매달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원형 구조물에 다가가 본다. 귀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고함지르듯 입을 크게 벌린 채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다. 최수앙의 ‘소음’은 모순된 의미를 지닌다. 고함지르듯 말을 쉽게 내뱉고 열을 올리지만, 정작 타인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의 이율배반적 모습이다. ‘소음’ 아래 벽면은 테츠야 이시다의 작품이 가득 매우고 있다. ‘리콜’은 사람마저 기계화된 삭막함을 보여준다. 소복을 입은 가족이 부품박스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하나하나 부품으로 나뉘어 박스에 담긴 남자는 기술이 발달한 나머지 사람마저 기계가 돼버린 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터뷰’에서는 군부 독재시절 오고가는 편지마저 검열하던 것처럼 현미경을 통해 사람을 적나라하게 평가한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인터뷰에 임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취업 면접장에 들어서는 우리의 안쓰러운 모습이 오버랩된다. 2전시실의 끝에 다다르면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 차례로 나타난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우리의 어머니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아이의 모습, 미국계 회사 피코 코리아 공장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이 회사의 불법 공장 폐쇄와 임금 미지금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 투쟁하는 그녀들. 그림패 ‘둥지’는 ‘정신없이 일터로’를 통해 일터로 향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육아부터 가족 부양까지 험난했던 80년대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과 투쟁하는 여성노동자의 모습은 그녀들을 억척스럽게 만든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 최수앙 '소음'(위), 테츠야 이시다 '리콜' (아래) /한영준 기자 han0young@
 
 
 
3전시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까지 파고든 권력을 발견하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것은 구석에서 빨간 빛을 내고 있는 형광등이다. ‘매복으로 사망한 이들을 위한 기념비 4(내게 죽음을 상기시켜준 P. K.에게)’는 댄 플래빈이 베트남 전쟁에서 매복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만든 기념비다. 불에 타오르는 듯한 이 작품은 관객이 여전히 ‘터전을 불태우라’는 주제 안에 들어와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긴장감을 되살리며 전시실 안에 있는 또 다른 건물로 들어간다. 진행요원은 이름을 물어보고는 관객이 뒤돌아 갈 때쯤 그 이름을 크게 외친다. 피에르 위그의 ‘네임 아나운서’ 퍼포먼스는 지금껏 긴장했던 관객에게 가벼운 웃음을 준다. 가벼운 웃음과 함께 들어간 ‘공간 속 공간’은 집 내부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다. 방 하나에 들어서자 반쯤 가려진 창문이 나온다. 토모코 요네다의 ‘기무사’ 창문이다. 밝고 아늑한 방에 달린 창문은 다름 아닌 간첩으로 의심받던 이들을 고문하던 기무사의 것이다. 모순적인 상황이 선뜻 다가오지 않지만, 서랍으로 꽉 찬 밀폐된 방에 덩그러니 놓인 창문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혀온다. ‘공간 속 공간’을 나서 텅 빈 공간에 들어서자 아파트 쪽을 향해 덩그러니 뚫린 창문이 보인다. 밀폐된 ‘공간 속 공간’에 갇힌 창문 그림을 보다 햇빛이 들어오는 진짜 창문을 보니 반가움이 앞선다. ‘불편한 이방인이 될 때까지’는 획일적인 한국 아파트 문화에 대한 레나타 루카스의 날카로운 비판이다. 창문에 비친 맞은편 아파트의 창 모양을 그대로 복제해,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의 획일적인 주거환경에 일침을 가한다. 창문과 ‘공간 속 공간’을 통해 삶의 공간 속으로 침투해 든 권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 공간 속 공간의 모습. /한영준 기자 han0young@
 
 
 
 
 
 
 
 
 
 
 
 
 
 
 
 
 
4전시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를 되돌아 보다.
 
휘장처럼 걸린 그림을 지나 마주한 류 샤오동의 ‘Time’에는 전남도청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치열함은 세월이 흐르며 희미해졌는지 아이들은 도청 앞 풀밭에 앉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과거 이 자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비장함과 처절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심한 표정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일어 난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작가는 요즘 세대의 망각을 지적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관객에게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돌아보게끔 한다. 발걸음을 내디뎌 전시실의 끝에 다다르자 진행요원은 느닷없이 이름과 시간을 묻고, 시간과 함께 이름을 하얀 벽에 적는다. 로만 온닥의 ‘시계태엽장치’는 전시 동안 관객의 답변으로 공간을 가득 채워나간다. 그리고 작가는 관객들의 이름과 방문시간의 흔적을 시계 방향으로 하나하나 남겨 일일 칼럼을 만들어낸다. 이는 역사를 기록하고 나아가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말한다. 전시실의 출구 역시 범상치 않다. 관객을 비추는 스크린 도어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금껏 작품을 통해 작가가 남긴 의미를 생각해봤다면, 이제는 스스로에 대해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카르슈텐 횔러의 ‘미닫이문’은 전시실을 나가는 관객에게 나는 누구인지, 더 나아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심오한 질문을 전지고 있었다.
 
▲ 류 샤오동 'Time' /한영준 기자 han0young@
 
▲ 로만 온닥 '시계태엽장치' /한영준 기자 han0young@

 

 

 

 

 

 

 

 

 

 

 

4전시실을 나온 관객은 홀로그램과 독백으로 가득한 5전시실을 지나 컨테이너 박스 두 개가 놓인 야외 전시장에 도착한다. 웅장한 컨테이너는 민간인 대학살 발굴 현장에서 나온 유해를 모아놓았고, 다른 한쪽의 굴뚝은 터전을 불태우고 남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