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촌사람들 - 인생의 단맛 하덕현씨

기자명 김태윤 기자 (kimi3811@skkuw.com)

일상에 치이고 주위 모든 것들에 지치는 순간이 있다. 외로움을 느껴 함께이길 갈망하면서도 옆자리의 누군가가 부담스러운 그런 날 찾게 되는 곳. 왁자지껄한 대명거리를 지나 우리 학교 정문을 향해 난 작은 골목을 걷다 보면 오묘한 빛을 풍기는 가게가 있다. 바로 ‘인생의 단맛’이다. 지난 3일 새벽 1시, 형형색색의 맛을 선보이는 하덕현(37)씨를 만났다.

▲ 인생의 단맛 입구. 노래방 조명이 눈길을 끈다. /김은솔 기자 eunsol_kim@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단맛’은 텁텁한 삶에 단맛 한 모금을 채우기 위한 이들로 북적였다. 자리에 앉자 곧 온갖 특이한 칵테일 이름으로 가득 찬 메뉴판이 도착했다. ‘엔조이가 어디 쉽나요’, ‘애인의 애인’, ‘존스홉킨스 병원 수간호사’ 등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칵테일 이름. 모두 사장인 하덕현씨의 노트에 담겨 있던 글귀들에서 따온 것이다. “평소에 어디서 들은 말, 책에서 본 인상 깊은 문장 모두 적어 놔요. 그런 메모가 칵테일 이름이 되고, 거기에 맞춰 개연성 있는 레시피를 만들어요.” 실제로 ‘엔조이가 어디 쉽나요’는 여행 중에 만난 친구가 남긴 말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가 칵테일에 이토록 애정을 쏟게 된 계기는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 간 ‘제주도 여행’이었다. 바닷가 출신인 그에게도 제주도 특유의 푸른 바다색은 오래토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제주바다색을 칵테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만들면 재미가 없으니까 ‘한라산 소주’를 넣어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한라산 소주와 파란색을 표현하는 칵테일 재료에 레몬즙을 더해 첫 칵테일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그의 메모장에 쓰여 있던 수많은 구절은 각자에게 맞는 레시피를 만나 이색적인 칵테일로 탄생했다. 
그는 2012년 5월, 성균관대 앞 명륜동에 첫 가게를 차렸다. 그는 처음 이곳을 찾은 손님의 대부분은 ‘변태’였다고 회상했다. 놀라는 기자에게 그는 “나쁜 의미의 변태가 아니라, 굉장히 호기심이 많고 특이한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오셨던 것 같아요”라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변태’란 말이 이해가 될 정도로 가게에는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 온갖 골동품과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돌고래 풍선, 어색하게 놓인 회전목마 오르골에 몽환적으로 흐르는 인디와 포크 음악. 어디서 영감을 얻었냐는 질문에 그는 “영감을 얻었기 보다는 제약이 있었어요”라며 멋쩍게 답했다. 이렇다 할 인테리어 소품을 살 만큼의 돈이 없었던 그는 중고나라 사이트와 성대 주변 곳곳을 돌며 쓸 만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가게가 참 특이한 게 뭘 갖다 놔도 얼추 어울리더라고요.” 입구에 반짝 거리는 노래방 조명은 청계천 상점에서 싸게 사 온 아이템이다.
‘한결 같은 맘, 한결 같지 않은 맛’이라는 장사 철학을 가진 그는 성균관대 학우들과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식 사진을 찍어준 캠퍼스 커플도 있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학우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 남학우가 호감 가는 이성을 데리고 오면 술 이름을 소재로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도록 재밌는 칵테일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술을 찾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인생의 쓴맛’을 느껴서일 터. 기억에 남는 학우의 사연이 있는지 묻자 그는 비밀로 할 게 많다며 잠시 머뭇거렸다. “연인일 때 자주 찾았던 두 남녀가 헤어진 후에 다시 올 때 서로 만날까 두려워 미리 연락해 상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창 추억에 잠긴 그에게 인기 비결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창의적 칵테일과 함께 가게가 주는 만만하고 편안한 느낌을 꼽았다. “부담 없이 혼자 올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자취생들의 사랑방이 된 것 같아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런 공간이 없었기에 더 꿈꿨는지도 몰라요.” 한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들도 술집에 혼자 오기 어려운 손님을 배려하기 위한 마음에서다.
‘인생의 단맛’엔 어떠한 화려한 수식어도, 거품도 없다. 그의 창작 칵테일 ‘허영의 불쏘시개’를 아무 생각 없이 젓다 보면 화려했던 무지개 색 빛깔은 온데간데없고 잿빛의 칙칙함만이 감돈다. 그가 늘 한결같은 겸손함으로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엔 잿빛으로 변하고 마는 허영의 덧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20대잖아요. 저는 콕 집어 ‘인생의 단맛’을 보기보단 가게의 수많은 칵테일 맛처럼 다양한 삶의 맛을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삶 가운데 ‘단맛’을 맛보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아프고 힘든 ‘쓴맛’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