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뿌리 깊은 나무>

기자명 정혜윤 기자 (heayoun12@naver.com)

중후한 북소리와 잔잔하고 부드러운 선율, 그 속을 자유로이 나는 작은 나비의 섬세한 몸짓이 연극의 시작을 알린다. 창작가무극 ‘뿌리 깊은 나무’는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한글 창제를 둘러싼 거대한 비밀을 조명한다. 한글 반포 568돌을 맞아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 뮤지컬 '뿌리 깊은 나무'의 배우들이 말을 타고 공을 치던 조선시대의 무예를 재연하고 있다. /ⓒ 서울예술단 제공

어린 시절, 유일한 피붙이인 고모 덕금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채윤은 이를 묵인한 세종에 원망을 품는다. 그리고 10년 뒤, 집현전 학사 정상수가 가슴에 단도가 꽂힌 채 우물 위로 떠오른다. 뒤이어 차례로 목숨을 잃어가는 집현전 학자들. 고모의 죽음에 대해 듣기 위해 세종을 찾은 채윤은 우연히 살인사건을 밝히는 임무를 맡게 된다. 채윤은 학사의 서재와 죽임을 당한 곳이 다르다는 점에 의문을 품는다. 연쇄 살인사건은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들고 세상을 바꾸려고 한 이들의 죽음 뒤에 깔리는 구슬픈 노래는 관객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미궁 속 사건의 단서는 마방진, 죽은 학사들의 팔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저주받은 금서 ‘고군통서’뿐. 풀리지 않은 사건을 맞닥뜨린 채윤은 스스로 진실을 구하는 것만이 답이기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한다. 채윤으로 분한 배우는 ‘답을 스스로 구하라’는 노래를 부르며 결의를 다진다. 곧 채윤은 금서 ‘고군통서’에 담긴 엄청난 진실을 마주한다. ‘고군통서’는 20년 전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금서로,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죽은 학자들의 팔에 새겨진 문신 또한 세종을 도와 천문학 연구, 금속활자 개발, 한글 창제 등을 진행한 비밀 프로젝트의 일원임을 알리는 하나의 표식이었다.
명나라로부터 공녀를 바치라는 요구에 굴복하며 수많은 이를 떠나보낸 세종은 ‘제가 진정 당신의 백성입니까?’라며 울부짖는 백성의 탄성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괴로워하던 세종은 하나뿐인 누이를 공녀로 떠나보낸 무휼을 부둥켜안으며 백성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그 생각은 ‘고군통서’를 낳았다. 결국, 연쇄 살인사건은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고군통서’를 손에 넣고자 명과 협력해 벌인 음모였던 것이다. ‘싸움은 시작되었다’는 노래와 함께 빨라지는 속도와 커지는 진폭은 그 박진감을 더한다. ‘죽은 학자가 하던 일과 그가 죽은 장소는 물과 불처럼 상극의 관계에 있다.’ 水(수)-火(화)-木(목)-金(금)-土(토)로 순환하는 음양오행설을 깨우친 채윤. 문신을 통해 죽은 자들의 공통점을 정리하면서 죽음의 순서를 예측한 채윤은 다음 범행 장소를 알아내 희생양이 됐을 학자를 구한다.
천한 자는 꿈을 펴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세상, 그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 세종은 이들의 혼이 담긴 글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고단한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는 그의 꿈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노랫소리와 함께 더 선명해진다. “새로운 글자에는 새로운 혼이 있으니 백성이 글을 익히면 이제와는 또 다른 하늘과 땅이 열리면서 조선의 세상이 올 것이다.”
학자들의 죽음 곁에 있던 마방진의 비밀을 이미 깨우쳤던 세종.. 마방진은 곧 세종의 통치 철학이었다. 마방진에 숫자를 채워나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정해진 1의 위치와 배열원칙을 따른다. 세종은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왕과 그의 통솔방식이 중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로와 가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같은 마방진의 원리를 통해 세종은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한글 창제’에 대한 빗발치는 반대로 인한 안타까움과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조력자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고뇌와 슬픔은 구슬픈 노래와 함께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회전무대 위 신하들의 혼란스러운 움직임을 배경으로 한 세종의 모습에서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는 그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극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세종은 기득권의 거대한 음모와 살인사건의 배후세력을 알아내 이를 벌하고 동시에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무대 가득히 울려 퍼지는 ‘뿌리 깊은 나무’ 노랫소리. 한글 창제에 힘쓴 세종의 노고와 고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오늘날, 우리에게 공기처럼 닿아있는 한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대한 비밀스러운 일화와 그 속 인물의 심리가 극적으로 펼쳐져 관객의 숨을 조이기도,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외로이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과 훈민정음이 반포되기까지의 그 비밀을 들어보고 싶다면, 오늘 저녁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게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