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강신강 기자 (skproject@naver.com)

이번 대회에서는 '인문학 콘서트'를 마련해 6명의 인문학자가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 인문학의 위치에 대해 다소 엇갈린 주장을 한 두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경기대 사학과 김기봉 교수
 이번 학술대회는 성균관대 문과대학이 소통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이날 발표가 지식의 공급자들, 즉, 교수들의 목소리로만 가득 찼던 것은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대학의 위치와 그 속에서 인문학의 위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학생의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지금 인문학은 식민지가 돼 살아남느냐 아니면 죽느냐의 문제에 처해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사회 속에서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
이전 시대의 대학과 지금의 대학은 위치가 다르다. 이것에 대한 분석이 이뤄져야 하고 그 다음 학문 생태계 속에서 인문학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인문학 대중화라고 하는 것도 여태까지 생산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여기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한다. 인문학의 대중화는 곧 대중의 인문화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대중과 사회의 수요에 맞는 인문학을 생산해야 하고, 그 속에서 문과대학의 역할을 재정립해야한다.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김누리 교수
인문학은 가치를 다룬다. 일각에선 인문학의 유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역으로 유용성이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문학은 무용성의 가치를 말한다. 소위 ‘문사철’이라고 부르는 학문은 무용성의 유용성을 보여주는 학문이다. 그런데 생산, 수요와 같은 개념을 인문학에 쓰는 것은 학문을 상품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쳐놓은 울타리를 뛰어넘는 장소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인문학이 ‘정의定義 권력’을 회복해야한다는 이야기다. 정의 권력은 사태를 주장하는 힘. 즉, 현상이나 대상을 규정하는 힘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대학을 정의하는 주체가 기업가가 돼버렸다. 대학은 이들의 정의에 따라가기 바쁘다. 주객이 전도됐다. 인문학이 소외된 것이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중앙일보 대학평가인데, 성대에서 이런 학술대회가 열려 놀랐다. 성대의 인문학자들이 교수로서 기본 덕목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계기로 자본이 추구하는 단기적 유용성의 위험을 생각해보며 인문학 본연의 정의 권력을 회복해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