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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신문 (webmaster@skkuw)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발전을 멈추었으며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것이 정체되거나 퇴보한다고 느껴질 때 가장 잘 발전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남을 비난하는 언어다. 이렇게 날로 자극적으로 변하는 말들 속에서 최근 본인이 들은 흥미로운 비판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은 너무 냉정하다. 신고전학파의 사상이다.”라는 말이다.
처음에 이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무슨 말인가’ 싶어서 황당했다. (그렇다면 경제학도로서 영광이지만) 본인이 하이에크나, 프리드만, 그리고 루카스와 같다는 것인가? 혹은, 인문학도였던 그녀는 차가운 경제학을 공부하는 본인이 달갑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다면 왜 굳이 ‘신고전학파같다’라고 하는 것인가? 냉정한 사람은 신고전학파인가? 혹은 신고전학파는 냉정한가?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따뜻한 ‘케인지안’이었던 것인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세상에서, 이 물음에 보다 더 래디컬하게 다가가기 위해 신고전학파 그 자체보다는 이를 수용해 발전시킨 신자유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신자유주의가 ‘냉정하다’라고 인식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약육강식의 경쟁원리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약육강식의 원리 때문에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비난의 의도로 사용할 수는 없다. 히피족의 협동조합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시사회의 물물교환 경제든, 보호무역주의든, 자유방임주의든, 혹은 케인지안시대든,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었고 타인과 항상 배타적으로 경쟁했다. 신자유주의자와 가장 잘 대립되는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인 케인지안의 의견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라는 기본적인 가정 하에 그 주체만 조금 바뀐 셈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케인지안의 시대에는 국가가 이기를 주도하고 신자유주의의 시대에는 기업이 이기를 주도하는 것으로, 국가 간의 경쟁이 기업 간의 경쟁으로 쪼개지고, 개인의 성공은 그의 국가의 성공보다는 그를 고용한 기업의 성공에 달리게 된 것, 그 뿐이다. 이 두 시선 중 온정주의에 기반한 시선은 없다. 둘 다 이기와 탐욕을 인정한 시선으로, 각각 국가의 탐욕과 기업의 탐욕을 키워드로 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냉정하다’라고 인식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약육강식의 경쟁원리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약육강식의 원리 때문에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비난의 의도로 사용할 수는 없다. 히피족의 협동조합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시사회의 물물교환 경제든, 보호무역주의든, 자유방임주의든, 혹은 케인지안시대든,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었고 타인과 항상 배타적으로 경쟁했다. 신자유주의자와 가장 잘 대립되는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인 케인지안의 의견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라는 기본적인 가정 하에 그 주체만 조금 바뀐 셈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케인지안의 시대에는 국가가 이기를 주도하고 신자유주의의 시대에는 기업이 이기를 주도하는 것으로, 국가 간의 경쟁이 기업 간의 경쟁으로 쪼개지고, 개인의 성공은 그의 국가의 성공보다는 그를 고용한 기업의 성공에 달리게 된 것, 그 뿐이다. 이 두 시선 중 온정주의에 기반한 시선은 없다. 둘 다 이기와 탐욕을 인정한 시선으로, 각각 국가의 탐욕과 기업의 탐욕을 키워드로 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냉정하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복지에 대한 시선의 차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케인지안들은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선택적 복지를 주장한다고 여겨진다. 이를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일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은 복지에 완전히 반대한다고 오해하는데, 이는 케인지안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보는 것과 같은 꼴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케인지안들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온정주의’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케인지안들은 성장에 있어서 정부지출의 증가로 국민의 가처분 소득을 증가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때 복지의 확대는 정부지출을 증가시키는 여러 가지 도구 중 하나로, 후버댐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리고 심지어는 전쟁과 동일한 부류의 경제적 효과를 낸다. 케인지안들에게 있어서 복지는 단순히 빈민구제를 넘어선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의료비, 보육비 등등을 면제받은 ‘평범한’ 국민이 주말에 영화를 한 편 더 볼 수 있게 하고, 더 비싼 음식을 먹게 함으로써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원리다. 물론, 경제가 극심한 침체기에 있을 떄 유용한 방법이며. 이는 케인즈 경제학이 ‘불황의 경제학’이라 불리는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지관을 근거로 신자유주의자들을 냉정하다고 매도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보편적 복지가 더 냉정할 수 있지는 않은가? 이 자문에 나는 고등학교 때 수험서에서 봤었던 ‘로잘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로잘린이 공평성에 도취된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생일에도 다른 자매들과 똑같은 크기의 조각 케이크를 받아서 울음을 터트렸다는 이야기인데,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필요한 만큼 전달되지 않고, 덜 필요한 곳에 필요량보다 많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로, 만약에 당신이 중산층 이상일 때, 고로 의료비나 보육비 등등을 충당할 수 있는 상태에서 단지 ‘온정주의’를 근거로 보편적 복지에 찬성한다면, 당신은 당장 생활이 불가능한 가난한 이웃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세금으로 주말에 영화를 보고 더 비싼 음식을 먹고자 하는 양심 없는 사람이다.
본인의 결론은 이와 같다. 아직까지도 본인은, ‘그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신고전학파라는 말을 비난의 의도로 사용하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사람들이 케인지안과 신고전학파를 바라볼 때 저마다 색안경을 쓰고 바라본다는 점이다. 사실 케인지안과 신고전학파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에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근간도 없다. 이들 학파의 의견이 갈리는 것은 그저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몇몇 전제가 다르기 때문인데, 간단히 소개만 하자면 가격의 신축성, 정보의 불완전성, 거래적 화폐수요, 투기적 화폐수요 등등을 전제함에 있어서 정반대의 성향을 보인다. 이 전제의 차이가 두 학파의 극명한 대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케인지안과 신고전학파는 근본적으로 보면 어떠한 도덕률이 아닌, 순수한 거시경제의 학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