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일 년 전 이맘때는 격동의 시기였다. 철도 민영화라는 의제를 두고 철도노조는 유례없는 규모의 파업에 돌입했고 대선, 국정원 이슈와 맞물리며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이 집회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고려대학교에 한 장의 대자보가 붙었다. “안녕들 하시냐고” 묻는 이 대자보는 순식간에 전국 곳곳, 각계각층에서 “안녕하지 못하다”는 화답을 받았다.
많은 대학생의 화답은 동시에 반성이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안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반성이며, 고백이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잠시나마 ‘정치’가 복권된 순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이처럼 ‘정치적’이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성에조차 정치적이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도대체 정치가 뭘 잘못했기에 이토록 부정적인 수사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정치적이란 수사를 무엇에 대한 반대 논거로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 데에는 그 행동이 특정 정파 혹은 특정 세력의 이익에, 특히 권력의 획득에 복무한다는 생각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학내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개최를 반대하며 세월호 유가족이 정치적으로 변질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주장은 특히 정당과 관련된 사안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학내 정당 관련 행사라든가, 학생회장 후보자의 당적과 관련해서 말이다.
물론 비정치를 요구하는 이들은 분명히 그와 같은 사고를 특정 세력이 아닌 모든 세력에 동일하게 들이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 세력 간의 권력관계가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데 있다. 세월호 유가족이 그들 혼자였다면 정부에 요구는커녕 의혹 제기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정치적이며, 정치적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행위이자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행위인 동시에 문제 해결을 위해 거쳐야만 하는 행동인 것이다.
비정치에 대한 요구가 특히 기득권, 보수 세력, 우익에서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불평등한 권력관계하에서 기계적 중립은 강자를 지지한다는 것과 절대 다를 수 없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을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이라고 평했지만, 어쨌든 비정치적이고자 하는 개인의 판단과 입장 역시 존중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공동체 속 인간은 그 자체로 정치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인에게 비정치적일 것임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멍청하거나, 가장 비열하게 정치적이다.
첫 대자보 이후 일 년이 지났다. 사실 그 일 년 동안 변한 건 거의 없다. 오히려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뜨거웠던 겨울의 대자보를 통해 우리는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배웠다. 내가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정치적이라는 것. 그렇기에 정치적이란 표현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안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 말이다.

▲ 조현재(러문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