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택수 기자 (ltsu11@ naver.com)

 월드뮤직은 다양한 장르와 역사를 포괄하는 음악이다. 그 안에서 여러 요소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현상 자체를 중시하는데, 월드뮤직의 가치는 바로 여기 있다. 한국에도 아일랜드 전통음악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의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가 있다. 하림이 바로 그다. 그는 프랑스 집시스윙 그룹 ‘집시앤피쉬오케스트라’와 ‘하림과 집시의 테이블’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하림은 ‘하림과 집시의 테이블’ 공연에서 방랑 민족 ‘집시’를 테마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각국의 음악을 들려준다. 지난 20일 열린 하림과 집시의 테이블을 보고 자유로운 영혼, 하림을 만났다.

▲ 하림과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 /Ⓒ하이퍼컴퍼니 제공

 
암전된 무대.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실루엣에 의문을 느낄 무렵,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독특한 음악이 들려오며 막이 오른다. 감성을 자극하는 하림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독일 전통악기 ‘드렐라이어’의 하모니가 돋보이는 ‘연어의 노래’. 콘서트 하림과 집시의 테이블은 집시의 뿌리인 북인도에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집시처럼 잔뜩 기운 옷은 입은 마임이스트 정명필은 아름다운 몸짓으로 음악을 묘사한다. 고개를 숙이고 느릿하게 내딛는 발걸음은 방랑을 시작하는 집시의 걱정과 기대감을 담고 있는 듯하다. 마음 깊숙이 묻어둔 추억을 닮은 드렐라이어 특유의 음색은 관객에게 1500년 전 시작된 집시의 방랑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덧 하림의 노래가 절정에 달하면 관객은 여행의 은은한 감성에 젖어든다.
여행을 시작한 집시는 프랑스에 도착한다. 빠르고 경쾌한 템포로 울려 퍼지는 프랑스 ‘집시 스윙’은 무대를 유쾌한 파티장으로 만든다. 바이올린, 기타, 아코디언, 베이스의 선율이 서로 섞이며 칵테일 같이 어우러진다. 음악에 심취해 상상의 나래를 펴면, 어느새 역마차로 꾸며진 무대에서 집시여인과 춤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활기차게 시작한 선율은 끈적하고 유혹적인 바이올린 소리가 되고, 집시들이 마시는 와인에 취하듯 공연의 분위기에 빠져든다.
프랑스의 축제 분위기에 아직 취해있을 때, 집시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리스로 향한다. 그리스 전통악기 ‘부주키’의 발랄한 반주와 보컬리스트 미유의 몽환적인 목소리는 지중해 바다를 연상시킨다. 사람을 홀리는듯한 목소리에 이색적인 가사,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ehe geia pana geia’. 그리스 하층민들의 노래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흥겹지만, 어딘가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그리스 탐방을 마치고 집시는 아일랜드로 발걸음을 옮긴다. 청아한 음색의 ‘아이리시 휘슬’이 아일랜드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그에 맞춰 댄서가 춤을 춘다. 아이리시 휘슬은 집시앤피쉬오케스트라를 리드하며 흥을 돋운다. 조그맣지만 묻히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아이리시 휘슬의 음색은 우리의 전통악기 대금을 닮았다. 아이리시 댄서의 발은 휘슬의 인도에 따라 무대 위를 노닌다.
관능적 선율을 연주하며 집시를 아르헨티나로 이끄는 반도네온 그룹 ‘고상지 트리오’. 그들이 연주하는 피아졸라의 ‘프리마베라 포르테나’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노래하며 관객 사이에 탱고의 싹을 틔운다. 숨 막힐 듯한 반도네온에 공연장은 어느새 남미의 한복판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관객은 고상지 연주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음악에 흠뻑 젖는다. 피아노로 시작해 바이올린, 반도네온으로 이어지는 연주에 공연장에는 탱고가 활짝 꽃핀다.
여행의 끝 무렵,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던 집시가 느낀 영혼의 떨림. 어떤 말로도 수식할 수 없는 아름다운 그녀를 만난다. 그의 행복을 위해 집시가 연주하는 사랑의 노래와 춤은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마저 녹인다. 오랜 여행의 피로는 사랑으로 씻겨나가고 집시의 입가는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로써 집시를 따라 세계를 돌아다녔던 여행도 끝이 났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관객의 얼굴에는 즐거운 여행이 끝난 사람처럼 아쉬움이 감돈다. 하림은 음악을 통해 가끔은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를 찾아 여행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