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세상 - 해리성 정체감 장애

기자명 강신강 기자 (skproject@naver.com)

내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어떨까? 최근 MBC와 SBS에서 방영 중인 <킬미, 힐미>와 <하이드 지킬, 나>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흔히 ‘다중 인격’이라고 알려진 증상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과거부터 창작물의 소재로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그럼에도 두 방송사에서 동시간 대에 같은 소재를 다룬 드라마를 편성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장르의 특성 상 재미를 위하여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학술부에서는 새롭게 선보이는 ‘술술 풀리는 세상’ 코너를 통해 우리에게 비춰지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모습의 진실과 거짓을 가려보고, 이에 대해 보다 깊이 알아보았다.

 

내 안의 다른 나, 어떤 증상일까?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의 정신의학적 정의는 ‘최소한 2개 이상의 뚜렷이 구분되는 자아상태가 동일한 신체 내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정신 장애 진단 분류 체계인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4(DSM-Ⅳ)’에 따르면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올바르게 진단되려면 적어도 2개 이상의 별개 인격, 즉 ‘나’ 이외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별개 인격이란 존재감, 사고, 감정 및 행동 방식이 각기 다른 상태로서,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각기 다른 시간에 출현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둘 이상의 자아가 반복적으로 행동을 통제해야 하며, 적어도 하나 이상의 자아가 개인사를 회상하지 못해야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정말 그럴까?

1. 차도현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신세기는 기억하고 있다? → 진실

‘킬미 힐미’의 주인공 ‘차도현’은 자신의 다른 인격인 ‘신세기’가 등장하면 그가 출현한 순간부터 다시 본래의 인격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세기’는 출현하지 않더라도 ‘차도현’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이는 사실이다. 각각의 별개 인격은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 신체의 본성과 활동을 결정한다. 주된 별개 인격은 다른 별개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도 전혀 모를 수도 있으며, 이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 다른 자아들이 무엇을 하고 경험하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 다른 자아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별개 인격이 존재할 수 있다.

▲ 갑자기 폭탄을 제조할 수 있게 된다? / ⓒMBC

  2. 별개 인격이 출현하면 신체적 변화를 동반한다? → 거짓

‘신세기’가 출현하면 ‘차도현’의 목 뒤에 문양이 생긴다. ‘페리 박’은 폭탄을 능숙하게 제조할 수 있다. 이렇게 원래는 없던 신체적 변화나 능력이 생기는 것이 가능할까? 정답부터 말하면 불가능하다. ‘신세기’의 출중한 싸움 실력은 평소 운동을 즐기는 ‘차도현’의 신체능력이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없던 능력이나 갑작스러운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에서 최초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 판결로 무죄를 선고받아 유명해진 빌리 밀리건 역시 별개 인격이 나타나면 갑자기 러시아어를 할 수 있게 된다거나 자물쇠를 풀 수 있게 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떤 한 인격이 모두 학습한 후 별개인격들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이 치료과정 중 밝혀졌다.

  3. 남자인 내 몸에 여고생이 존재한다? → 거짓

‘차도현’의 별개 인격 중 ‘안요섭’의 쌍둥이 동생이기도 한 ‘안요나’는 17살 여고생이다. 이처럼 남성의 몸에 여성의 인격을 가진 자아가 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성별과 관련된 또 다른 사실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여성이 남성보다 적어도 3배 더 많다는 점이다. 또한, 여자는 15개, 남자는 8개 정도의 인격을 평균적으로 갖고 있다. 물론 이 중에는 본래의 인격의 성과는 다른 성을 가진 인격도 있을 수 있다.

▲ 남자의 몸에 여고생이 존재한다? / ⓒMBC

 4. 심박 수가 올라가면 다른 인격이 등장한다? → 거짓

‘하이드 지킬, 나’에서 ‘구서진’은 심박 수가 높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관리에 힘쓴다. 바로 또 다른 인격인 ‘로빈’이 구서진의 심박 수가 일정치 이상 높아질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환자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의 인격 교대는 특정 상황에서 이뤄지거나 인격 간 조정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두고 이뤄지지는 않는다. ‘Martin’(가명)이라는 환자는 인격의 교대를 “어두운 방 한가운데 의자가 놓여있다. 그 의자에 앉으면 신체를 차지하게 된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 심박수가 올라가면 다른 인격이 등장할까? /ⓒSBS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원인

개인에게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도상금 임상심리전문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거의 모든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는 아동기에 극심한 학대를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원인에 대한 두 가지 주요 이론이 각각 ‘외상 후 모형 이론’과 ‘사회인지 모형’이다. 그러나 실제 환자 중 학대받은 사람의 비율은 상당히 높지만, 학대받은 사람 중 이러한 증상을 나타내는 비율은 극소수이기 때문에 이 두 이론은 왜 학대받은 사람 중 일부에게만 나타나는지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상 후 모형에서는 특정 사람들이 외상에 대한 방어 기제로 해리를 특히 사용하기 쉬우며, 이것이 외상을 받은 후 별개 성격을 발달시키는 주요 원인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에 폭력을 당하면서 폭력을 당한 ‘나’를 원래의 ‘나’와 해리시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나’를 보호하는 것이다. 사회인지 모형에서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사회적 역할 수행을 학습한 결과로 간주한다. 이 모형은 별개 성격이 △문화적 영향에 대한 반응 △치료자의 암시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대한 언론보도의 영향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치료 과정 중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이 장애가 갖는 특이함 때문에 논란 역시 많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것을 장애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둘러싼 논란을 살펴보자.

몇몇 임상 이론가들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문화와 관련된 문화 특수적 장애라 주장한다. 북미에서의 유병률은 증가 추세에 있지만,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영국, 스웨덴, 러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에서는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장애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장애다. 게다가 미국 내 문화 집단별 유병률 추세를 살펴보면,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에게서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특별히 드물게 나타난다.

위의 논란을 잠재울 이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야 미국을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해졌기 때문에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그라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