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범준 기자 (magic6609@naver.com)

 “갓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열심히 씻겨야 한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최초로 받은 주변 인상에서 잠시 쉬도록 한 다음에는 매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촉구하여야 한다. ‘쓰지 마! 쓰지 마! 작가가 되면 안돼!’ 만약 이러한 태형에도 불구하고 이 젖먹이가 작가적 소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살살 구슬리기를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구슬리기도 도움이 안 된다면 그 때는 단념하고 이제 ‘가망 없음’이라고 써라. 작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불치의 병이다.”

 안톤 체홉 선집『개와 인간의 대화』에 실린「신참 작가를 위한 지침서」의 첫 문단이다. 트레이닝 기간 빌려본 『개와 인간의 대화』를 읽으면서 참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 중 「신참 작가를 위한 지침서」는 내가 격한 공감에 무릎이 피멍이 들 정도로 무릎을 탁 치며 보았던 글이다. 이 문단에서 ‘작가’를 ‘기자’로 바꾸면 바로 이게 ‘신참 기자를 위한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성대신문사에 들어가 볼까?’하는 무척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다. 나도 그랬으니.
 
방중에 추가 수습기자로 들어와 보통 한 학기에 걸쳐 진행되는 수습트레이닝 과정을 두 달 단기 속성으로 끝냈다. 알바, 골방 독서·사색 활동과 병행하면서 피곤하고 귀찮음을 느끼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래도 잘 버틴 것 같아 내가 자랑스럽다. 트레이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다른 수습기자와 “와. 정말 시험하나 끝난 것 같아.”하며 짧은 소감을 주고받았으니, 나만 힘들다고 느낀 것은 아닐 거다.
 
내가 처음 성대신문사의 문을 두드린 것-문자 그대로 두드렸다-은 ‘비사범계열학생의 교직이수 신청’건과 관련해서였다. 나는 이번 학기를 2학년 2학기로 영문과에 엇학기 복학하는데, 나는 영문과 교직이수 과정을 신청할 수 없었다. (2학년 2학기 말에 신청을 받는)우리학교의 교직이수 제도 특성상 엇학기 복학생을 포용하지 못하는 제도의 경직성 때문이었다. 다른 학교의 사례를 찾다, 2011년 ‘성대신문’에 실린 엇학기 복학생 교직이수 관련기사를 읽게 되었다. 4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같은 문제점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료를 취합해서 깔끔하게 한글파일로 정리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춘 글을 썼는데, 어디로 메일을 보내야 할지 몰라, 당돌하게도 교무처와 학생지원팀 전체에 메일을 보냈다. 나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었다. 결국 사범대학 행정실 관계자를 직접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큰 진척이 없었다. 큰 변화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인가’하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행정실을 나오는 길. 문득 ‘이 대학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존재론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그래도 이 학교 학생이다.’ 그래서 뭐. 내가 일개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커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읽었던 성대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관련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법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그들은 집 안에서, 탄탄한 침대에서, 탄탄한 지붕 밑에서, 매트리스 위로 몸을 쭉 뻗치거나 오그린 채 시트 속에서 이불을 덮고 잠자고 있다. …… 그런데 너는 깨어 있다. 너는 파수꾼의 하나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만 한다." - 카프카의 산문 「밤에」중에서.
 
누군가는. 한 사람은 깨어있어야만 한다. 성대신문은 성균관대학교의 파수꾼이다. 모두가 잠든 밤에 환하게 불이 켜진 신문사의 모습을 상상한다. 글 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 곳이 내가 속할 곳이라고 생각했고 그 길로 곧장 성대신문사를 찾아가서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역시 신문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는 논리의 전쟁터다. 아직 제대로 된 부서기사를 쓰지는 못했지만, 기사를 쓰는 것이 어떤 일일지 대충 알고 있다. 기사를 쓴다는 것은 한발, 한발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이다. 문장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일이다. 내안의 목소리와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이다. 치열한 전쟁의 끝에 남는 것은 아마도 낮아진 학점과 적은 보수, 너덜너덜한 정신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신문사에 들어왔는가?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농담이다. 그러나 이 답이 없는 여정이 그렇게 막연하거나 절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흥분된다. 너무 재밌을 것 같다. 어서 이 미친 여정을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답이 없는’ 여정에 발을 들이고자 하는 ‘가망 없는’ 그대들에게 안톤 체홉의 문장을 빌려 한마디 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 ‘지침서’의 첫 번째 문장 몇 줄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