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안상훈 기자 (tkd7827@gmail.com)

 

치열했던 지난 2014학년도 2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잘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대외활동을 찾아보기도 하고, 영상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기 했다. 하지만 조건을 재다보니 두려움이 커지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홧김에 1월에 친구가 제안한 신문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기 중에 하던 신문읽기를 조금 더 강제적으로 해보자는 의도였을 뿐이다. 그렇게 한 달간 꾸준히 신문을 읽고 매일 글을 썼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신문 위의 생판 처음 보는 단어들을 찾아가면서 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냥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좋았다. 스터디가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서 누워있는데 나에게 문자가 하나 왔다.
 
‘성대신문 수습기자 추가 모집’ 문자를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수습기자 지원서를 작성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었다. 내가 다음 학기에 22학점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학과 장비실 공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무시한 채 그냥 적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을까. 적어도 2월은 바쁘게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논술 시험을 보러갔다. 이제까지 쓰던 글 보다는 약간 더 많은 분량의 글을 적어야 했기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 스터디를 하면서 생각했던 기성 언론의 기자상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글을 풀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면접이었다. 난 타고난 발표 울렁증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준비해오는 말도 잘 못하는데 즉흥적으로 말하려니 더욱 힘들었다. 옆에 있는 친구가 말을 잘해서 더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했다. “어떻게 성대신문에 들어오게 되셨죠?” 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홧김에 들어오게 됬는데 면접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면접을 끝내고 술을 마시다가 신문사에 오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냥 담담하게 붙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부터 수습기자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두꺼운 책을 하나 받았고 난 그 책을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솔직하게 처음부터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습기자 동기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다. 군 생활만 빼고 어디에 가든 항상 막내였기 때문에 상황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습일기를 쓰게 되기까지 잘 버텨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학기 중 기자생활이 시작되는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기대되고 궁금하다. 혹시나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일으켜 세워줬으면 좋겠다. 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가만히 있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잡아내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좋다. 이때까지의 내 삶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 중에 잘못된 일도 있고 잘된 일도 있다. 야구가 그렇듯이 아무리 잘 치는 타자도 1000개 중에 400개 이상의 안타를 치기가 어렵다. 홧김에 성대신문을 선택할 다음 기자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결정장애는 짜장이냐 짬뽕이냐 선택할 때만 하는 걸로 족하다.